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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Shattered Lands - Five Partitions and the Making of Modern Asia (2025)

bus333 2025. 8. 10. 13:50

 

 

 

 

샘 달림플의 책 "산산조각 난 땅"은 대영 제국의 인도 분할과 그로 인한 12개 국가 형성의 복잡한 역사를 탐구합니다. 이 책은 1937년 버마와 아라비아의 분리와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초기 분할부터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그리고 궁극적으로 1971년 방글라데시의 독립에 이르는 일련의 상호 연결된 사건들을 조명합니다. 저자는 종종 민족주의적 서사에 의해 간과되거나 재해석되는 분할의 연쇄 효과와 그 원인을 밝히며, 이 과정에서 힌두 민족주의의 역할 다양한 민족 집단의 복잡한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이 저작은 이러한 격변적인 변화가 남긴 지속적인 영향과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추적합니다.

 

 

 

 

 

출처: Sam Dalrymple의 "Shattered Lands - Five Partitions and the Making of Modern Asia" (2025년) 발췌문. (William Collins, HarperCollinsPublishers 인쇄)

작성일: 2024년 5월 15일

 

주요 주제 및 핵심 내용:

이 보고서는 Sam Dalrymple의 "Shattered Lands - Five Partitions and the Making of Modern Asia" 발췌문을 바탕으로, 20세기 영국령 인도 제국이 여러 독립 국가로 분열되는 과정을 다룬다. 저자는 흔히 간과되는 아시아의 다섯 가지 분할이 어떻게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오늘날의 남아시아 지도를 만들었는지 강조한다. 이 발췌문은 지정학적 변화,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긴장, 개인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며, 특히 인도-버마 분할, 아라비아 분할, 그리고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전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1. 근대 남아시아 국경의 가변성 및 식민지 유산

  • 식민지 이전의 통합 부족: 1928년까지만 해도 오늘날 남아시아를 가르는 국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한 세기 전에는 이 국경 중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론, 3페이지). '분할되지 않은 인도'라는 개념 자체도 1947년 단 5개월 동안만 존재했던 식민지적 구성물이었다 (서론, 7페이지).
  • 영국령 인도의 광범위한 범위: 영국령 인도는 현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버마와 아라비아 반도 일부(아덴, 페르시아만 국가들)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였다 (서론, 3-4페이지). 아부다비가 번왕국 목록에 알파벳순으로 가장 먼저 등장했을 정도로 그 범위는 광범위했다 (서론, 4페이지).
  • 번왕국의 다양성과 중요성: 인도 내 번왕국들은 카슈미르가 프랑스보다 크고 하이데라바드가 벨기에와 비슷한 규모의 경제를 가질 정도로 다양하고 상당한 국가들이었다 (서론, 5페이지). 이들 왕국의 통치자들은 "종종 엄청나게 부유한 인물들이었다" (서론, 5페이지).
  • 국경의 물리적 현존: 오늘날 인도-파키스탄 국경은 "아라비아해에서 카슈미르의 빙원까지 3천 킬로미터 이상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나누기 위해 지구 표면에 눈에 띄게 새겨져 있다." (서론, 1페이지). 이처럼 오늘날 남아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요새화되고, 울타리가 쳐져 있으며, 지뢰가 매설된 지역 중 하나이다." (서론, 2페이지).

2. 다섯 번의 주요 분할과 그 영향

저자는 남아시아를 형성한 다섯 가지 분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이들 분할은 서로 연관되어 다음 분할에 영향을 미쳤다 (서론, 7페이지).

  • 제1차 분할: 버마의 분리 (1937년): 민족적 요구와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바라트' 개념에 따라 버마가 인도에서 분리되었다. 이는 "기근, 치명적인 이주 위기를 촉발하고 여러 반란의 씨앗을 뿌리는"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서론, 6페이지). 저자는 이 분할이 인도 민족주의가 "힌두적 색채"를 띠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무슬림들을 소외시켜 파키스탄 창설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1장, 49페이지).
  • 사이먼 위원회와 분리 논쟁: 1928년 영국이 인도의 새로운 헌법 개혁을 제안하기 위해 파견한 사이먼 위원회는 인도의 광범위한 반대에 직면했다. 위원회는 버마에서도 반대 시위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버마 분리가 거의 만장일치로 지지된다고 오판했다 (서론, 17-20페이지).
  • 버마의 반인도 정서와 폭력: 분리 이후 버마에서는 반인도 외국인 혐오가 정치 이념으로 변모했으며, 이는 1938년 기록상 가장 큰 유혈 사태를 초래했다 (3장, 53페이지). 우 사우(U Saw)와 같은 인물들이 타밀계 체티아르(Chettiar) 공동체 등 인도 이민자들을 겨냥한 폭력을 선동했다 (3장, 50-51페이지).
  •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도인 대탈출: 일본의 침공 위협과 버마 정부의 외국인 차별 정책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인도인들이 "장거리 행군"을 통해 인도로 피난했다 (4장, 70페이지). 이 과정에서 "길을 따라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황소 수레는 그 위로 지나갔다." (4장, 80페이지). 이 경험은 피난민들에게 깊은 트라우마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4장, 81페이지).
  • 제2차 분할: 아라비아 반도의 분리 (1937년~1947년): 아덴의 분리를 시작으로 페르시아만 국가들이 인도 제국에서 이관되었다. 이 분리가 없었다면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한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이 독립 후 인도나 파키스탄의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서론, 6-7페이지). 이들 국가들은 네팔, 부탄과 함께 21세기까지 온전하게 살아남은 유일한 번왕국들이다.
  • 영국령 인도의 아라비아: 아덴은 "영국령 인도 제국의 가장 서쪽 요새이자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뭄바이 주(Bombay Province)의 일부로 통치되었다 (서론, 9-10페이지). 인도인들이 아랍인보다 인종적 계층에서 우위에 있었으며, 이는 아랍 공동체의 불만을 야기했다 (서론, 10페이지).
  • 수에즈 위기와 아랍 민족주의: 1956년 수에즈 위기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입장의 "무용함을 드러냈다" (11장, 297페이지).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의 아랍 민족주의는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시민권 요건에 아랍어 지식을 포함시키는 등 남아시아 공동체의 배제로 이어졌다 (11장, 298-299페이지).
  • 제3차 분할: 영국령 인도의 "대전환" (1947년): 인도 내 힌두교도 다수 공동체와 거대한 무슬림 소수 민족 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여 파키스탄이 창설되었다. 이는 "20세기 남아시아의 중심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강제 이주"를 야기하며 "서사적인 규모의 폭력"을 초래했다 (서론, 7페이지).
  • 직접 행동의 날 (Direct Action Day) (1946년 8월 16일): 무슬림 연맹이 파키스탄 설립을 위한 직접 행동의 날을 선포하면서 "인도의 무슬림과 힌두교도 간의 정치적 힘겨루기는—그때까지 협상 테이블과 토론장에서 벌어졌던—폭력으로 변했다." (6장, 148페이지). 콜카타에서 "4천 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으며, 이는 공동체 간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다 (6장, 153페이지).
  • 무질서와 폭력의 확산: 폭력은 동벵골에서 비하르, 연합주로 서쪽으로 확산되었다. 힌두 준군사 단체와 무슬림 연맹 국가 경비대가 폭력의 선두에 섰다 (6장, 154페이지). 국경 발표가 독립 후에 이루어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었고, 이는 대규모 이주와 살상으로 이어졌다 (6장, 197페이지).
  • 디나 진나 (Dina Jinnah)의 상실: 파키스탄의 창시자인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는 딸 디나가 파르시 남편과 함께 인도에 남기로 결정하면서 개인적인 상실을 겪었다 (7장, 199-200페이지). 진나 가족처럼 수많은 가족들이 분할로 인해 나뉘게 되었다.
  • 제4차 분할: 번왕국의 통합 (1947년~1948년): 영국령 인도의 분할 이후, 500개 이상의 번왕국들은 인도나 파키스탄에 편입되거나 독립을 유지할 선택권이 주어졌다 (7장, 187페이지). 이는 광범위한 공산주의 반란의 위협과 파텔(Patel) 및 메논(Menon)의 외교적 압력으로 이어졌다.
  • 하이데라바드 (Hyderabad)의 몰락: 데칸의 무굴 제국 파편이었던 하이데라바드는 번왕국 통합의 주요 사례였다. 니잠(Nizam)은 독립을 주장했지만, 인도 정부는 '국경 사건과 불안정을 조작하여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10장, 262페이지). 라자카르스(Razakars)라는 무슬림 준군사 단체가 폭력을 행사하며 상황은 악화되었다. 1948년 9월, 인도군은 '폴로 작전'(Operation Polo)을 통해 하이데라바드를 침공하여 니잠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10장, 272-274페이지).
  • 카슈미르 분쟁: 카슈미르의 미래는 통치자(힌두교도 마하라자)와 주민(대다수 무슬림)의 종교가 달랐기 때문에 복잡했다 (9장, 225-226페이지). 파키스탄은 부족군을 지원하여 침공을 시도했고, 인도는 마하라자의 인도 편입 문서 서명(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다 (9장, 232-237페이지). 이는 남아시아 핵 확산의 원인이 되었다 (9장, 224-225페이지).
  • 제5차 분할: 파키스탄의 분할과 방글라데시의 탄생 (1971년): 24년 후 파키스탄은 내전으로 분열되었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이는 "사상자가 30만 명에서 3백만 명에 이르는" 비극이었다 (14장, 368페이지).
  • 언어 운동 (Language Movement): 1952년 파키스탄 정부가 우르두어를 유일한 국어로 선언하자, 벵골인들은 이에 반발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특히 2월 21일 다카 대학교에서 경찰의 발포로 학생들이 사망한 사건은 "방글라데시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는 순간"으로 회고된다 (11장, 290-291페이지).
  •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Sheikh Mujibur Rahman)의 부상: 무지부는 동파키스탄의 불만을 대변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벵골인의 자결권을 주장하며 "파키스탄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3장, 337페이지). 그는 비밀리에 인도 정부의 지원을 모색했다 (13장, 338-339페이지).
  • 사이클론과 군사 진압: 1970년 치명적인 사이클론에 대한 파키스탄군의 느린 대응은 양 날개 간의 관계를 "붕괴 직전"으로 몰고 갔다 (13장, 354페이지). 1971년 3월 25일, 파키스탄군은 무지부와 아와미 연맹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인 '서치라이트 작전'(Operation Searchlight)을 개시했다. 이는 "동부에 대한 전쟁 선포"였다 (13장, 362페이지).
  • 대규모 난민 사태와 '선택적 학살': 서치라이트 작전 이후 수백만 명의 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었으며, 이들 중 80%는 힌두교도였다 (14장, 375페이지). 미 영사는 이 사건을 "선택적 학살"이라고 보고하며, 힌두교도들이 "특별 대우를 위해 노골적이고 계산적으로 광범위하게 선택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14장, 372-373페이지).
  • 국제적 개입과 음악의 역할: 인도군은 무크티 바히니(Mukti Bahini)를 지원하며 전쟁에 개입했고, 미국과 소련은 냉전적 관점에서 분쟁에 휘말렸다 (14장, 377-378페이지). 라비 샨카르(Ravi Shankar)와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의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와 같은 음악 활동은 분쟁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장, 390페이지).
  • 파키스탄군의 항복과 방글라데시의 탄생: 인도의 공군 및 해군 우위 확보와 다카 봉쇄 이후, 파키스탄군은 1971년 12월 16일 다카 경마장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14장, 403-404페이지). 이는 "위대한 남아시아 전쟁"의 종식과 방글라데시의 탄생을 의미했다 (14장, 404페이지).

3. 분할의 지속적인 영향과 역사적 망각

  • 현재까지의 갈등: 남아시아의 국경은 여전히 분쟁의 원천이며,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장을 한 채 긴장 상태에 있다 (서론, 1페이지; Epilogue, 430페이지).
  • 역사적 망각과 민족주의적 서사: 각 후계 국가들은 복잡한 과거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국가가 "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적 역사를 구축했다 (서론, 8페이지). 예를 들어, 방글라데시는 "해방 전쟁"을 창립의 순간으로 숭배하지만, 인도와 버마로부터의 이전 분할은 공공 기억에서 지워졌다 (Epilogue, 427페이지).
  • 개인의 트라우마: 분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집, 언어, 우정, 가족, 땅의 상실이라는 복잡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Epilogue, 429페이지). "75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관광 협정이 없으며, 역사상 가장 큰 강제 이주로 인해 이주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Epilogue, 429페이지).
  • 국민 정체성의 인위성: 저자는 나갈랜드가 인도에 속하지만 미얀마가 아닌 이유, 시킴이 인도에 속하지만 네팔이나 부탄이 아닌 이유를 질문하며, 현대 국민 정체성이 1930년대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인위적인 구성물임을 지적한다 (Epilogue, 425-426페이지).

결론:

"Shattered Lands" 발췌문은 영국령 인도 제국의 해체가 단순한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 여러 분할의 복잡한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할은 남아시아의 지정학적 지형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내 민족, 종교, 정치적 긴장을 심화시켰으며, 수많은 개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실과 트라우마를 남겼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가 종종 간과되거나 민족주의적 서사에 의해 왜곡되었음을 강조하며, 복잡한 과거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남아시아의 지속적인 도전과 과제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NotebookLM이 추천하는 질문을 통해 본 책의 내용

 

 

질문1 : 이전에 간과되었던 인도 제국의 분할 과정과 그 영향은 무엇인가?

 

제공된 자료는 인도 제국의 분할이 종종 간과되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과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다양한 영토와 인구에 영향을 미치며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한 일련의 상호 연관된 분리였습니다.
이전에 간과되었던 분할 과정과 그 영향:
인도 제국의 첫 분할 (1937년: 버마와 아덴):
    ◦ 배경: 대영 제국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영국은 대전 후 미래를 바라보며 새로운 헌법 개혁을 계획했습니다. 이에 따라 사이먼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나, 인도인의 참여가 배제되어 인도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사이먼 돌아가라")가 벌어졌습니다.
    ◦ 버마 분리:
        ▪ 영국과 인도에서 모두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던 버마의 인도 제국으로부터의 분리는 1937년 4월 1일에 발효되었습니다. 이 분리는 인도에 대한 영국 지배의 종말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고, 인도의 반응은 검은 완장과 검은 깃발을 내거는 등 부정적이었습니다.
        ▪ 분리 이전부터 **우 오타마(U Ottama)**와 같은 인물들은 버마의 분리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고, 심지어 힌두 마하사바와 같은 힌두 민족주의 단체와 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 분리 이후 버마 내 인도인에 대한 인종적 관계는 상상 이상으로 악화되었습니다. 특히 **우 사우(U Saw)**는 반인도인 외국인 혐오를 정치 이데올로기로 전환하며 **"갈론 파시즘"**이라는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히틀러의 유대인 대우를 이민자들에게 적용할 롤모델로 칭송하며, 팜플렛을 통해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고, 인도인 상점 보이콧과 괴롭힘을 조직했습니다. 이러한 폭력으로 인해 많은 인도인들이 버마를 떠나 인도로 이주했습니다.
        ▪ 나가족과 같은 소수민족 공동체는 자신들이 인도인도 버마인도 아닌 별개의 민족이라고 주장하며 독자적인 식민지화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했습니다. 버마가 인도에서 분리될 때, 나가족 인구의 약 5분의 1은 버마 쪽에, 나머지는 인도 쪽에 남게 되었습니다.
    ◦ 아덴 분리:
        ▪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아덴은 봄베이 주의 일부로 통치되었으며, 처음에는 인도인 상인들이 분리에 반대했습니다.
        ▪ 아덴에는 인도와 유기적인 연결을 보았던 인도 민족주의자들(구자라트인과 파르시인)뿐만 아니라, 인도 지배에 반대하는 아랍 민족주의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무함마드 알리 루크만(Muhammad Ali Luqman)**과 같은 인물들은 처음에는 인도 민족주의자였으나, 점차 반아랍 정서로 인해 아랍 연대를 옹호하게 되었습니다.
        ▪ 아덴은 버마와 같은 날 분리되었으나, 그 여파는 1967년 영국군 철수와 남아라비아의 새로운 국가 형성으로 이어지며 인도인과 파키스탄인 인구의 대규모 추방이나 기원 은폐를 강요했습니다.
    ◦ 영향: 1937년의 이 분할들은 후에 1947년 인도 분할의 선례가 되었고, "하나의 인도는 불가능한 현실이 될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습니다. 또한, 이러한 분할들은 인구 이동, 정체성 위기, 그리고 분리된 지역 내 소수민족에 대한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1947년 인도 분할의 간과된 측면 (번외):
    ◦ 주나가드(Junagadh): 힌두교 다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통치자 나왑이 파키스탄에 가입을 선언하여 큰 논란이 되었고, 결국 인도의 "경찰 조치"로 합병되었습니다.
    ◦ 카슈미르(Kashmir): 마하라자가 처음에는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장 세력의 침공과 인도의 개입으로 분쟁 지역이 되었습니다.
    ◦ 하이데라바드(Hyderabad):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던 니잠이 칼리프 국가 건설을 꿈꾸며, 인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인도는 경제 봉쇄를 가했으며, 결국 "경찰 조치"(Operation Polo)라는 명목으로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합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과 달리트 공동체에 대한 폭력이 발생했습니다.
    ◦ 나가랜드(Nagaland): 1947년 분할 당시에도 나가족은 인도와 버마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으며, **앙가미 자푸 피조(Angami Zapu Phizo)**는 나가 독립 운동을 이끌며 인도로부터의 분리를 계속 시도했습니다.
인도 제국의 마지막 분할 (1971년: 방글라데시):
    ◦ 배경: 1947년 인도 분할 이후 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과 서파키스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동파키스탄은 언어와 문화적 차이, 그리고 서파키스탄의 지배에 대한 불만으로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Sheikh Mujibur Rahman)**은 자치를 요구하는 6개 조항을 발표하며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 갈등의 고조: 야히아 칸(Yahya Khan) 파키스탄 대통령이 제헌 의회 소집을 연기하자,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특히 힌두교도와 언론을 표적으로 한 파키스탄 군대의 **"서치라이트 작전(Operation Searchlight)"**이 시작되면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 국제적 주목: 앤서니 마스카레냐스(Anthony Mascarenhas) 기자의 "제노사이드(GENOCIDE)" 보도와, **라비 샹카르(Ravi Shankar)**와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조직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desh)"**는 방글라데시 사태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을 높였습니다.
    ◦ 인도의 개입: 대규모 난민 유입과 힌두 민족주의의 부흥 속에, 인도는 무크티 바히니(Mukti Bahini)를 지원하고, 결국 1971년 12월 6일 방글라데시를 독립 국가로 공식 인정했습니다.
    ◦ 결과: 13일간의 전쟁 끝에 파키스탄군은 다카에서 항복하며 방글라데시가 독립했습니다. 이는 인도 제국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분할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독립 후에도 방글라데시는 기근과 군부 통치, 소수민족 문제 등 여러 난관에 직면했습니다.
이처럼 인도 제국의 분할은 단순히 1947년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그 전후로 다양한 지역과 공동체의 독립 염원, 민족주의적 갈등, 그리고 제국주의적 유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복잡한 역사적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2 : 인도 제국의 분할이 남아시아 지역의 정체성과 국경에 미친 장기적 영향은 무엇인가?

 

 

인도 제국의 분할은 남아시아 지역의 정체성과 국경에 지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여러 단계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샘 달림플의 저서 "산산조각 난 땅"에서 다루는 5차례의 주요 분할을 통해 그 영향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국경에 미친 장기적 영향
1. 제1차 분할: 인도-버마 및 아덴 분리 (1937년)
    ◦ 1937년 4월 1일, 인도 제국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분리하는 제1차 분할이 발효되었습니다. 버마는 새로운 국경과 함께 독립적인 식민지가 되었고, 아덴 역시 봄베이 주에서 영국 정부 직속으로 이전되었습니다.
    ◦ 이 분할은 나가족과 같은 특정 민족의 고향을 둘로 쪼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나가족 인구의 약 5분의 1이 버마 쪽에, 5분의 4는 인도 쪽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 아덴과 인도 간의 유대 관계는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아덴은 점차 '아라비아'의 일부로 인식되었습니다.
2. 제2차 분할: 인도-파키스탄 분할 (1947년)
    ◦ 1947년 8월 15일, 종교를 기반으로 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은 남아시아의 지도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는 몬트배튼 경이 75일도 채 안 되는 기간에 수 세기 동안의 영국 제국주의를 정리한 결과였습니다.
    ◦ 분할을 담당한 시릴 래드클리프는 인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채 몇 주 안에 펀자브와 벵골의 종교 혼합 지역을 분할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예측할 수 없는 혼란과 유혈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 카슈미르 분쟁의 시작: 카슈미르 번왕국은 인도나 파키스탄 중 어느 쪽에도 합병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부족 민병대('라슈카르')의 침공과 마하라자의 인도 합병 결정으로 인해 군사적 충돌이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경 분쟁이 되었습니다.
    ◦ 하이데라바드 병합: 1948년 인도군은 **'경찰 조치(Police Action)'**라는 명목으로 하이데라바드를 침공하여 인도로 병합했습니다. 파키스탄과 달리 하이데라바드는 인도 영토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독립 옵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3. 그 외 분할 및 영토 변화
    ◦ 과다르 이양 (1958년): 파키스탄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오만 술탄국으로부터 파키스탄 남서부의 항구 도시 과다르를 평화적으로 되찾았습니다. 이는 국제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되었습니다.
    ◦ 아라비아 왕정의 종식: 1960년대 중반부터 영국이 아라비아 왕정에서 철수하면서 남예멘 인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고, 아라비아 왕정의 19개 번왕국이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4. 제5차 분할: 방글라데시 독립 (1971년)
    ◦ 파키스탄 내 동서 파키스탄 간의 언어 및 경제적 격차가 심화되면서, 결국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통해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하게 됩니다.
    ◦ 이로써 구 인도 제국의 영토는 두 국가에서 세 국가로 분할되었습니다. 인도는 의도적으로 벵골의 재통일을 피하며 새로운 국경의 실체를 인정했습니다.
    ◦ 국경은 수십 년간 울타리가 없었으며, 분할 이후에도 대규모 난민 유입과 국경을 넘나드는 활동이 이어졌습니다.
정체성에 미친 장기적 영향
1. 종교적 정체성의 강화 및 충돌
    ◦ 힌두-무슬림 분리: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주창한 **'두 민족론'**은 종교적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과거 힌두-무슬림 화합의 대사(大使)였던 진나는 이제 힌두와 무슬림이 단일 국가를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 힌두트바(Hindutva) 이데올로기: 비나야크 사바르카르가 정립한 힌두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인 힌두트바는 힌두교도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며, 오늘날까지 인도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는 간디 암살의 배후 세력과도 연결됩니다.
    ◦ 종교적 편견과 폭력: 분할 과정에서 발생한 **'직접 행동의 날(Direct Action Day)'**과 같은 폭력 사태는 협상 테이블에 있던 갈등을 거리의 유혈 사태로 전환시켰으며, 종교적 정체성이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2.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의 부상
    ◦ 버마인 정체성: 버마 분리 이후 **'버마인을 위한 버마'**라는 구호와 함께 반인도적 제노포비아가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도계 이주민과 혼혈 자녀들은 정체성 혼란을 겪고 차별을 받았습니다.
    ◦ 나가족의 독립 열망: 나가족은 자신들이 인도인도 버마인도 아닌 독자적인 민족이라고 느끼며 독립적인 나가랜드 건설을 주장했습니다.
    ◦ 벵골 민족주의: 동파키스탄에서 언어 운동을 중심으로 벵골 민족주의가 성장했으며, 이는 결국 방글라데시 독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르두어 사용 이주민들은 '비하리인'으로 낙인찍히고 차별받았습니다.
    ◦ 아덴 아랍인 정체성: 아덴에서는 인도 지배에 대한 불만과 함께 아랍 민족주의가 부상하여 '대(大)예멘' 통합을 주장하고, 인도인 이주민들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습니다.
3. 이주와 난민의 경험
    ◦ 분할은 대규모 인구 이동을 야기했으며,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했습니다. 버마에서 인도로 돌아온 이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고, 하이데라바드 무슬림 난민들은 카라치에 **'하이데라바드 식민지'**라는 거주지를 형성했습니다.
    ◦ 작가 만토(Manto)와 픽르 타운스비(Fikr Taunsvi)는 분할로 인한 정체성 상실과 혼란을 깊이 있게 기록했습니다. 고향이 하루아침에 "외국"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4. 역사적 기억의 재구성
    ◦ 분할 이후 각 신생 국가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맞는 역사적 서사를 구축했습니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에서 누룰 아민(Nurul Amin)과 같은 인물은 '반역자'로 낙인찍히거나 잊혀지기도 했고, 인도의 독립 운동은 특정 인물 중심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 대규모 분할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워지거나 변형되기도 하여, 심지어 1947년 벵골 분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도 생겨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인도 제국의 분할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를 재조정하는 것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남아시아 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지형을 영구적으로 재편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질문3 : 제2차 세계 대전이 남아시아의 독립과 민족주의 운동에 어떤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제2차 세계 대전은 남아시아의 독립과 민족주의 운동에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영국 제국의 약화 및 인식 변화: 전쟁 전에는 영국령 인도 제국이 "불침함"처럼 가라앉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은 영국 제국의 무적이라는 인식을 깊이 흔들었습니다. 재정적 압박과 전후 영국의 역량 약화는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민족주의 운동의 가속화 및 새로운 정치 세력의 부상:
    ◦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의 부상: 진나와 무슬림 연맹의 영향력은 전쟁 중에 폭발적으로 커졌습니다. 그는 전쟁을 "위장된 축복"이라고 불렀으며, 무슬림이 단순한 소수 민족이 아니라 독립적인 국가이며 미래 헌법에 대해 동등한 협상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파키스탄 요구'는 전쟁의 결과로 인도 전역의 가정에서 격렬하게 논의되는 핵심 쟁점이 되었습니다.
    ◦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와 인도 국민군(INA): 보스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영국 식민 통치를 전복하려 시도하며 인도 국민군(INA)을 창설했습니다. INA는 간디, 네루, 아자드의 이름을 딴 부대들을 포함했고, 다양한 계급과 인종 배경의 인도인들을 끌어들였습니다.
    ◦ 버마의 독립 투쟁:
        ▪ 우 소(U Saw)의 반(反)인도 제노포비아: 우 소는 히틀러의 유대인 대우를 이민자들에게 적용할 역할 모델로 칭송하며 반인도적 제노포비아를 정치 이데올로기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는 일본과 비밀 접촉하여 영국 전복을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 아웅 산(Aung San)의 부상: 아웅 산은 처음에는 일본과 협력하여 버마 독립군(BIA)을 결성했으나, 나중에 일본에 등을 돌리고 영국과 동맹을 맺어 (애국 버마군으로 개명) 독립을 향한 길을 열었습니다.
    ◦ 나가족 민족주의의 강화: 나가족 공동체는 자신들이 인도인도 버마인도 아닌 별개의 민족이라고 주장하며, 시몬 위원회에 자신들만의 식민지를 요구했습니다. 전쟁 중에도 나가족 지도자 앙가미 자푸 피조(Angami Zapu Phizo)는 인도 또는 버마 국적을 선택하라는 압력을 거부하며 **"나는 첫째도 나가인, 둘째도 나가인, 마지막도 나가인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전쟁 후에도 그는 분할된 나가족 지역을 통합하여 나갈랜드(Nagaland)라는 독립 국가를 수립하려 했습니다.
영국 식민 권력의 쇠퇴:
    ◦ 대규모 동원과 군인의 복귀: 영국은 전쟁 동안 인도인들을 대규모로 모집하여 **역사상 가장 큰 비징병군(250만 명)**을 구축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수백만 명의 제대 군인들은 고향의 열악한 환경에 경악했고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며 자신들이 더 이상 용병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 행정 마비: 전쟁으로 인해 영국 행정 시스템이 마비되고, 식민지 관리들은 전쟁 노력에 집중하느라 다른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 급격한 독립 추진: 전후 영국 정부는 인도의 즉각적인 독립을 결정했으며, 이는 식민지 통치를 유지할 능력과 의지가 크게 약화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회적, 경제적 변화:
    ◦ 기근과 사회 불안: 벵골 지방에서는 전시 중 발생한 기근이 인구를 급진적으로 만들었고, 이는 전후에도 이어져 사회적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 반(反)인도 감정 고조: 버마에서는 인도의 분할 이후 인종 관계가 악화되었고, 우 소와 같은 정치인들이 반인도 감정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전환하여 조직적인 박해를 유발했습니다. 이는 수많은 인도인들이 버마를 떠나 인도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아라비아 반도에 미친 영향: 아덴은 이탈리아의 공습을 받았으며, 전쟁 노력에 대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도시 내에는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아덴의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반인도 정서가 커졌고, 이는 아랍 민족주의로 이어졌습니다.
분할의 선례와 변화된 정치 환경:
    ◦ 버마와 아덴의 분리: 1937년 버마와 아덴이 인도 제국에서 분리된 것은 향후 인도의 종교적 분할에 대한 선례를 제공했습니다. 비록 분리의 근거는 주로 행정적 편리함이었지만, 이는 큰 규모의 분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종교적 정체성의 부각: 전쟁은 인도 내 힌두교와 이슬람교 공동체 간의 종교적 정체성을 더욱 부각시켰고, 이는 진나의 파키스탄 요구와 힌두 민족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영국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고, 남아시아 민족주의 운동을 급진적으로 만들며,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을 부상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인도, 파키스탄, 버마 등 새로운 국가들의 탄생과 관련된 복잡한 분할 과정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