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어윈(Robert Irwin)이 저술한 이븐 할둔(Ibn Khaldun)의지적 전기(intellectual biography)발췌록으로,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Princeton University Press)에서 2018년에 발행되었습니다. 이 책은 할둔의 생애와 저술, 특히 그의 주요 저작인 무깟디마(Muqaddima)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또한오스만 튀르크(Ottoman Turks),프랑스 식민주의자(French colonialists), 그리고 현대 학자들을 포함하여할둔 사상이이후 시대와 서구 사상에 어떻게 수용되고 해석되었는지, 그리고 그의경제학, 사회학, 철학, 종교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무깟디마(Muqaddima)에 반영되었는지를 살펴봅니다. 자료는 할둔의수피즘(Sufism)과 신비주의(mysticism)에 대한 태도,재난(disasters)과 쇠퇴(decline)에 대한 그의 견해, 그리고 전설(legends)과 오컬트 과학(occult sciences)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여 그의 사유의 복합적인 측면(complexities)을 보여줍니다.
이븐 할둔: 삶, 사상, 그리고 역사적 유산
이븐 할둔(왈리 알-딘 압드 알-라흐만 이븐 할둔, 1332–1406)은 14세기 북아프리카의 격동기 속에서 살았던 아랍의 저명한 학자, 역사가, 사상가이다. 그의 이론적 저서인 『무깟디마(서설)』는 서구 학자들로부터 "그 어떤 시대와 장소에서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 가장 위대한 종류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근대 사회학, 경제학, 역사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종종 근대적 시각으로 재해석되거나 오해되기도 한다.
1. 주요 저작 및 생애 개요
이븐 할둔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무깟디마(The Muqaddimah: An Introduction to History)』: 역사 법칙에 대한 이론적 고찰과 이슬람 사회의 예술 및 과학 전반을 다루는 방대한 서문이다. 총 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 사회 일반, 유목 사회, 국가와 통치자, 도시 문명, 경제 활동, 과학과 예술. "토인비는 이븐 할둔의 『무깟디마』를 '그 어떤 시대와 장소에서도 그 어떤 정신에 의해서도 창조된 적이 없는 종류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Irwin, Preface, p. xvii)
『키타브 알-이바르(Kitab al-‘Ibar wa diwan al-mubtada wa’l-khabar)』: 『무깟디마』에 이어지는 방대한 연대기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과 아랍 부족의 역사와 그들이 세운 왕조들을 다루지만, 집필 과정에서 그 범위가 확장되어 더 광범위한 역사가 되었다.
『알-타리프 비 이븐 할둔 와 리흘라티히 샤르칸 와 가르반(Al-Ta‘rif bi Ibn Khaldun wa rihlatihi sharqan wa gharban)』: 종종 '자서전'으로 묘사되지만, 자기 성찰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자격과 공적 행적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둔다. 특히 티무르와의 만남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븐 할둔의 삶은 정치적 격동으로 점철되었다. 튀니스에서 태어난 그는 메리니드, 하프스, 압둘와디드 왕조에서 다양한 관료직을 역임하며 북아프리카 왕조들의 '왕좌의 게임'에 깊이 관여했다. 1375년 알제리의 외딴 성으로 은둔하여 『무깟디마』 초고를 완성했다. 1382년 맘루크 이집트로 이주하여 여러 차례 말리키 수석 카디(판사)를 역임했으며, 1400년에는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정복자 티무르와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1377년 11월, 『무깟디마』 초고는 살라마 부족의 성에서 완성되었다." (Irwin, Chronology, p. xxi)
2. 역사관의 핵심 주제
이븐 할둔의 역사관은 다음과 같은 주요 주제들을 통해 전개된다:
2.1. 역사가의 오류와 역사의 '내적 의미'
이븐 할둔은 역사가들이 실수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당파성. 둘째, 속기 쉬움. 셋째, 본질적으로 가능한 것에 대한 무지." (Irwin, Preface, p. xix) 그는 특히 세 번째 문제에 주목하여, 기존의 연대기 작가들이 역사의 '자히르(겉모습)'만을 기록하고 '바틴(내적 의미)'을 간과했음을 비판했다. 그는 사건의 개연성과 인과관계를 중시하며, 유사하거나 상이한 상황에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2. 폐허의 메시지와 문명의 순환
이븐 할둔은 북아프리카 전역에 널려 있던 고대 유적들을 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이븐 할둔은 폐허의 그림자 속에서 자랐으며, 폐허를 '책 속의 희미한 글씨'에 비유했다." (Irwin, Chapter 1, p. 3) 폐허는 세상의 덧없음과 권력의 무상을 경고하는 '이바르(경고, 교훈)'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1348년의 흑사병은 그의 이러한 사색을 더욱 심화시켰다. "문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라들을 황폐화시키고 인구를 사라지게 하는 파괴적인 역병에 시달렸다." (Irwin, Chapter 1, p. 18) 그는 역사가 단순히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신의 섭리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구현되는 '이바르'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2.3. 아사비야(‘Asabiyya): 사회적 연대와 왕조의 흥망성쇠
이븐 할둔의 가장 유명한 이론은 '아사비야(‘asabiyya)' 개념이다. 이는 유목 생활의 혹독한 환경에서 발전하는 부족 집단의 강력한 연대감을 의미한다. "사막 생활의 혹독한 조건 속에서 부족 집단은 필연적으로 이븐 할둔이 '아사비야'라고 부르는 특별한 종류의 집단적 연대감을 발전시킨다." (Irwin, Chapter 3, p. 13)
상승: 강력한 아사비야를 가진 부족은 군사적 이점을 가지며, 종교적 색채(예: 예언 또는 성인 신앙)가 더해지면 더욱 강력해져 기존 왕조를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다. "왕권은 집단 감정의 목표임이 분명하다." (Irwin, Chapter 3, p. 19)
쇠퇴: 그러나 몇 세대(보통 3~4세대) 내에 이 정복 부족들은 정주 문명에 동화되어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아사비야를 잃는다. 통치자는 더 이상 부족 전사들에게 의존할 수 없게 되어 용병을 고용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다. 이는 부패와 불경으로 이어져 왕조를 취약하게 만들고, 결국 새로운 유목민 부족의 공격에 의해 멸망한다. "왕조는 개인처럼 자연적인 수명을 가지고 있다." (Irwin, Chapter 3, p. 23)
유목민의 미덕과 도시인의 타락: 그는 유목민을 "정착민보다 더 선량하다"고 보았으며, "그들은 최초의 상태에 더 가깝고 정착민의 마음에 침투한 모든 악한 습관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Irwin, Chapter 3, p. 10) 반면 도시 생활은 "문명의 마지막 단계이자 부패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여겨졌다. (Irwin, Chapter 3, p. 32)
2.4. 계보학(Genealogy)
이븐 할둔은 계보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계보가 부족의 정체성과 아사비야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며, 종종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될 수 있음을 인식했다. "그는 많은 계보가 조작되었고, 혈통이 정치적 목적으로 위조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Irwin, Chapter 3, p. 45)
2.5. 경제 사상: 노동 가치설과 도시 번영의 역설
이븐 할둔은 경제 문제에 대해 광범위하게 기술했으며, 중세 아랍 작가 중 거의 유일하게 경제학적 고찰을 했다. "인간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함께 모여 공동체를 형성한다." (Irwin, Chapter 8, p. 1) 그는 '노동이 소득을 창출하며, 이윤은 노동에서 실현되는 가치'라고 주장하여 노동 가치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Irwin, Chapter 8, p. 4)
번영과 인구 밀도: 인구 밀도가 높을수록 도시는 번성하고 노동 분업이 가능해져 잉여 생산물을 창출하며 사치와 풍요로운 생활로 이어진다.
세금과 왕조의 쇠퇴: 초기 왕조는 낮은 세율로 많은 수입을 거두지만, 쇠퇴기에 접어들면 사치와 용병 비용 증가로 인해 세금을 올리게 되고, 이는 사람들의 노동 의욕을 저하시켜 세수가 감소하는 '래퍼 곡선'과 유사한 현상을 가져온다. "세율이 증가하면 사람들은 상업이나 다른 형태의 노동에 참여하기를 꺼린다. 따라서 세수는 감소한다." (Irwin, Chapter 8, p. 24)
도덕적 판단: 그는 상업을 '속임수'가 포함된 '유감스러운 필요성'으로 보았고, 과도한 자본 축적을 비판했다. 또한 통치자가 무역에 개입하거나 독점을 설정하는 것에 극도로 반대했다. 그의 경제 사상은 도덕적, 종교적 고려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2.6. 오컬트와 미래 예측
이븐 할둔은 마법, 점술, 꿈 해석, 점성술 등 초자연적인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마법의 현실성을 인정했지만, 예언자들의 신성한 예언과 마법사들의 행위를 명확히 구분했다. "지적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마법의 현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Irwin, Chapter 7, p. 8) 그러나 그는 사회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연금술과 보물 찾기와 같은 행위를 비판했다. 그는 점성술에 회의적이었지만, 권력의 이동과 같은 대규모 사건에 점성술적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2.7. 교육과 언어의 중요성
이븐 할둔은 교육 원리에도 깊이 천착했다. 그는 구전 지식 전달을 중요시했으며, 방대한 주석서와 요약본의 증가가 학문의 진정한 이해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그는 아랍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특히 초기 이슬람 시대의 순수한 아랍어 구사에 대한 낭만적인 시각을 가졌다. 시는 역사, 지혜, 언어 지식을 담는 중요한 매개체로 여겨졌다.
3. 이븐 할둔에 대한 현대적 해석
이븐 할둔은 지난 두 세기 동안 서구 학자들 사이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학자', '최초의 경제학자', '몽테스키외의 선구자'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사회학자로서의 이븐 할둔: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는 이븐 할둔을 "뛰어난 귀납적 사회학자"이자 "이상형의 방법을 발명하기도 전에 그것을 실행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Irwin, Preface, p. xvii) 겔너는 그를 세속적인 사회학자로 재해석하며 북아프리카 사회에 대한 그의 이론을 현대에 적용하려 시도했다.
역사가로서의 이븐 할둔: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이븐 할둔을 자신의 지적 선조로 여기며, 문명의 흥망성쇠에 대한 순환론적 이론을 정립하는 데 영향을 받았다. 토인비는 "이븐 할둔의 삶이 '철수'의 법칙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즉, 이븐 할둔은 정치에서 물러나 살라마 부족의 성에서 홀로 학문을 연구하는 시기를 가졌다." (Irwin, Chapter 10, p. 27)
철학자로서의 이븐 할둔: 무신 마흐디(Muhsin Mahdi)는 이븐 할둔을 그리스-이슬람 철학 전통에 속하는 합리주의자이자 정치 철학자로 보았다. 그는 이븐 할둔이 당시의 철학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자신의 철학적 주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식민주의적 해석: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이븐 할둔의 저작을 북아프리카의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차용했으며, 아랍 침략의 파괴적인 영향에 대한 그의 주장을 인용하여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현대 아랍 세계의 재발견: 19세기와 20세기 아랍 르네상스(나흐다) 시기에 이븐 할둔은 아랍 지식인들에게 재발견되었다. 타하 후세인(Taha Husayn)과 같은 학자들은 그를 천재로 칭송하면서도 그를 현대적 의미의 과학적 역사가나 사회학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4. 한계와 유산
이븐 할둔은 자신의 저작에서 때때로 불일치와 모호함을 보였다. '아사비야', '바다위(badawi)', '아랍'과 같은 핵심 용어의 사용이 일관적이지 않았으며, 맘루크 체제의 역사적 순환 면역 여부 등에서도 모순을 드러냈다. "그는 '아사비야', '바다위', '아랍'을 포함한 특정 핵심 용어의 사용에 있어 일관적이지 않았다." (Irwin, Chapter 11, p.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븐 할둔의 『무깟디마』는 특정 시대와 지역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와 역사의 보편적인 법칙을 찾아내려 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는 경제, 기후, 친족 유대, 초자연적 요소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 역사의 전개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함으로써 현대 사회 과학의 문을 열었다. 그의 사상은 현대에도 여전히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으며, 그의 독창적이고 심오한 통찰력은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븐 할둔의 이론적 모델과 결론이 현대 사회에 적용될 수 없더라도, 그가 중세의 전제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당대 세계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강력한 이론적 모델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다윈, 마르크스, 뒤르켐과 비교될 수 있다." (Irwin, Chapter 11, p. 5)
NotebookLM이 추천하는 질문을 통해 본 책의 내용
질문1 : 이븐 할둔의 지적 여정은 이슬람 세계의 지리적, 정치적 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
이븐 할둔의 지적 여정은 그가 살았던 이슬람 세계의 격동적인 지리적, 정치적 변화에 깊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이동과 다양한 통치자들 밑에서의 봉사로 점철되었으며, 이는 그의 독특한 역사 및 사회 이론 형성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븐 할둔의 지적 여정과 이슬람 세계의 지리적, 정치적 변화의 연관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다양한 궁정에서의 봉사와 정치적 환경:
◦ 이븐 할둔(1332-1406)은 튀니스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상은 안달루시아 세비야에 정착했던 명문가 출신으로, 학자이자 행정가의 가계였습니다.
◦ 그는 생애 전반부에 페즈의 메린 왕조,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 틀렘센의 '압드 알-와디드 왕조,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 등 다양한 북아프리카 궁정에서 자문 및 관료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의 경력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복잡하고" 이동이 잦았는데, 이는 14세기 북아프리카의 격동적인 정치 환경을 반영합니다.
◦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이 아닌, 부족 지도자들과 협상하고 유목민 군대를 모집하며 때로는 직접 전투를 이끄는 등실제적인 정치 및 군사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유목민과의 깊은 접촉은 그의 중심 사상인 '아사비야(집단 연대감) 이론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 개인적인 좌절과 지적 은둔:
◦ 흑사병의 영향: 1348-49년 북아프리카를 휩쓴 흑사병은 이븐 할둔의 부모와 친구, 스승들을 앗아갔습니다. 이 사건은 그로 하여금 세상의 변화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했고, 이는 무깟디마를 저술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 정치적 실패와 은둔: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 경력, 투옥과 배신은 그가 무깟디마를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왜 자신이 정치적으로 실패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습니다.
◦ 칼아트 바누 살라마에서의 집필: 1375년, 그는 정치에서 은퇴하여 서부 알제리의 외딴 성채인 칼아트 바누 살라마로 피신했습니다. 이곳은 로마 유적지 근처에 있었으며, 그는 이곳에서 4년간 무깟디마 초고를 집필했습니다. 이 시기는 도서관과 지적 교류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피즘의 할와 (일시적 은둔을 통한 명상)와 비견될 만한 깊은 성찰의 시간이었고, 그의 "완전히 독창적인 과학"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변 부족민들의 생활 방식을 관찰하며 책을 읽는 것 이상으로 자극을 받았다고 언급했습니다.
• 폐허에 대한 성찰과 역사관 형성:
◦ 이븐 할둔은 어릴 때부터 북아프리카 전역에 널려 있던 "폐허의 그림자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 지역은 한때 더 번성하고 인구가 많았음이 폐허를 통해 명백했습니다.
◦ 그는 폐허를 "책의 희미한 글씨"에 비유하며, 과거의 영광과 문명의 쇠락을 깊이 고찰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폐허는 그에게 '이바르 (교훈 또는 경고)를 제공했으며, 그의 저서 무깟디마의 주요 주제인 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메시지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이집트에서의 학문적 확장:
◦ 1382년, 그는 튀니스의 학자 이븐 '아라파 알-와르가니와의 갈등으로 인해 하즈(성지순례)를 핑계 삼아 이집트 카이로로 떠났습니다.
◦ 맘루크 이집트의 지적 중심지: 카이로에 도착한 후, 그는 이집트의 번영과 학문적 기회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카이로의 도서관에서 지식을 보충하고, 페르시아와 튀르크 왕조에 대한 정보를 추가하며 무깟디마와 '이바르의 범위를 확장했습니다.
◦ 맘루크 제도에 대한 평가: 이븐 할둔은 맘루크 제도를 "신의 선물"로 보며, 유목민 전사들의 활력을 지속적으로 수입하여 '아사비야를 인위적으로 강화하는 방식으로 왕조를 유지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순환 이론을 이집트의 특수한 정치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 티무르와의 만남: 1400년 다마스쿠스 성벽 밖에서 세계 정복자 티무르와 가진 역사적인 만남은 그의 삶과 타'리프(자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이 만남을 통해 자신의 '아사비야 이론을 유목 제국 지도자인 티무르에게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븐 할둔의 지적 여정은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의 변화하는 정치적 지형, 개인적인 좌절, 그리고 학문적 추구의 기회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사상, 특히 집단 연대감('아사비야)과 문명의 순환적 흥망성쇠에 대한 그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며, 무깟디마를 단순한 역사서가 아닌 사회 현상에 대한 심오한 분석서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삶의 불안정성은 세상의 무상함과 문명의 필연적인 쇠락에 대한 그의 비관적인 시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질문2 : 그의 방법론적 혁신과 사상이 당대 및 후대 학자들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해석되었는가?
이븐 할둔의 방법론적 혁신과 사상은 당대에는 제한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후대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되고 해석되었습니다.
1. 당대 학자들의 수용과 해석
이븐 할둔은 당대 및 직후의 학자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그의 저작은 아랍 세계에서 거의 잊혔습니다.
• 비판적 시각:
◦ 이븐 아라파 알-와르가니: 튀니스에서 활동한 주요 말리키 학자이자 법학자로, 이븐 할둔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그의 법률 지식이 형편없다고 평가했습니다.
◦ 아흐마드 이븐 하자르 알-아스칼라니: 카이로의 저명한 학자였던 그는 이븐 할둔의 강의가 훌륭하고 유창하며 흥미롭다고 인정했지만, 그가 거짓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이븐 할둔이 동방 이슬람 역사를 잘 몰랐고, 화를 잘 내며, 이집트 카디(판사)의 공식 복장을 거부하는 등 "모든 것에 반대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븐 할둔이 위조 판결을 내렸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 샴스 알-딘 무함마드 알-사카위: 이븐 하자르의 학생으로, 이븐 할둔을 무례하고 오만하며 성적으로 부도덕하고 위조범이라고 비난하는 악의적인 평가를 남겼습니다. 그는 역사를 종교 과학의 보조적인 것으로 보았고, 주로 하디스(예언자 언행록) 전달자의 신뢰성을 시험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 바드르 알-딘 알-'아이니: 이븐 할둔이 오리엔탈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비도덕적인 가정 생활과 동성애를 비난했습니다.
• 제한적인 지지 및 영향:
◦ 알-마크리치: 이븐 할둔의 제자 중 한 명이었던 그는 무칻디마를 "지식과 과학의 정수이자 건전한 지성과 정신의 즐거움"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븐 할둔의 경제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근본적인 방법론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 무함마드 이븐 '암마르: 이븐 할둔의 강의를 들었던 그는 무칻디마를 위대한 문학 작품이자 학문의 포괄적인 조사라고 평가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븐 할둔은 그의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독특하고 이단적인 인물로 여겨졌으며, 그의 혁신적인 사상은 종종 오해받거나 무시되었습니다.
2. 후대 학자들의 수용과 해석
이븐 할둔의 사상에 대한 진정한 탐구는 그가 사망한 지 수세기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 오스만 투르크:
◦ 16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오스만 학자들은 이븐 할둔을 초기 지지자이자 학문적 조상으로 여겼습니다.
◦ 카팁 첼레비(17세기)와 나이마(18세기 초) 같은 역사가들은 이븐 할둔의 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한 순환 이론을 받아들여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설명하고 체제 개혁을 위한 지침으로 활용했습니다.
◦ 무칻디마의 일부가 터키어로 번역되었으며 (1749년), 무함마드 알리(19세기 초 이집트 통치자)는 이븐 할둔을 재번역하여 그의 국가 통치술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 유럽 오리엔탈리스트 및 학자:
◦ 19세기 초 '재발견': 앙투안 아이작 실베스트르 드 사시와 조제프 폰 함머-푸르크슈탈 같은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이븐 할둔을 유럽 지성계에 처음으로 소개했습니다.
◦ 함머-푸르크슈탈: 그를 "아랍의 몽테스키외"라고 불렀으며, 몽테스키외처럼 기후와 환경이 문명에 미치는 영향 및 사회 발전의 근본 원인을 탐구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 프랑스 식민주의적 해석: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화 이후, 프랑스 학자들은 이븐 할둔의 저작을 식민주의 프로젝트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현대적인 프랑스인"으로 포장되어, 북아프리카의 아랍-베르베르 간 영원한 갈등과 아랍 침략의 파괴적인 영향을 강조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 빈센트 몽테이유: 20세기 중반 무칻디마를 재번역하며, 이븐 할둔을 마키아벨리, 계몽주의 사상가, 심지어 다윈의 선구자로 묘사하며 사회학의 발명자라고 주장했습니다.
◦ 아놀드 토인비: 20세기 세계 역사가인 그는 이븐 할둔을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동종의 작품 중 단연 최고"라고 칭송하며 그를 자신의 지적 조상 중 한 명으로 보았습니다. 토인비는 이븐 할둔의 삶을 자신의 "철수, 에테르화, 회귀"의 법칙에 부합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그의 흥망성쇠 순환론과 도덕주의적 관점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토인비는 이븐 할둔을 영어권 세계에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 하밀턴 깁: 이븐 할둔을 엄격한 말리키 법학자이자 신학자로 보았으며, 그의 비관주의는 사회학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종교적 기반을 가졌다고 해석했습니다.
◦ 마셜 호지슨: 무칻디마를 "이슬람 문명에 대한 최고의 일반 입문서"로 평가하며, 이븐 할둔을 그리스-이슬람 전통의 철학자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 어니스트 겔너: 이븐 할둔을 **"훌륭한 귀납적 사회학자"이자 "이상형의 실천가"**로 칭송하며, 그의 이론이 20세기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븐 할둔을 세속화하고 현대화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그의 도덕적 설교를 경시했습니다.
• 현대 아랍 학자:
◦ 나흐다(아랍 르네상스)의 일환: 19세기 및 20세기 초 아랍 지성인들은 유럽에서 재발견된 이븐 할둔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 리파아 알-타흐타위: 카이로에서 무칻디마를 출판하며, "애국심"을 일종의 '아사비야'로 해석했습니다.
◦ 타하 후세인: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이븐 할둔을 천재로 칭송하면서도, 그가 근대적인 의미의 과학적 역사가나 사회학자는 아니며, 그의 종교성은 예방적 성격이 강했다고 주장했습니다.
◦ 무함마드 압둘라 에난: 이븐 할둔을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보았고, 그의 경력을 마키아벨리와 비교했습니다.
◦ 아지즈 알-아즈메: 이븐 할둔의 명성이 대부분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칭송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며, 그가 독창적인 인물이나 보편적 역사 이론가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븐 할둔에게 철학은 주변적인 학문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 압데셀람 체다디: 이븐 할둔의 중세 민족지학자 및 인류학자로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겔너의 유럽중심적 해석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븐 할둔이 그리스-이슬람 철학 전통의 철학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 벤살렘 힘미쉬: 이븐 할둔을 심하게 우울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그의 글이 권위자와의 지적 갈등, 고독, 죽음에 대한 접근을 다룬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는 이븐 할둔의 경제 사상을 마르크스와 비교하며 유목주의, 전제 정치, 부족주의의 해악을 오늘날 제3세계에 대한 교훈으로 보았습니다.
3. 총체적인 해석과 핵심 개념
이븐 할둔의 사상은 그 자체의 복잡성과 모호성으로 인해 수많은 해석을 낳았습니다.
• 아사비야(사회적 연대): 이븐 할둔 사상의 핵심으로, 부족 집단이 혹독한 환경에서 발전시키는 집단 연대를 의미합니다. 이는 왕조를 세우고 무너뜨리는 동력이 되지만, 도시 생활의 사치와 안락함 속에서 필연적으로 약화되어 왕조의 쇠퇴를 초래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개념은 현대에 와서 클랜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적용되기도 하지만, 이븐 할둔은 이를 사회 변화의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엔진으로 보았습니다.
• 역사의 순환론: 왕조가 탄생하고, 사치와 부패로 쇠퇴하며, 새로운 부족 전사들에 의해 전복되는 순환적인 패턴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비관적인 시각을 담고 있지만, 신의 섭리가 자연적인 사회 변화를 통해 작동한다는 종교적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도덕적, 종교적 기반: 현대 학자들이 종종 이븐 할둔을 세속적인 사상가나 사회학자로 해석하려 하지만, 그의 사상 기저에는 말리키 법학에 대한 깊은 헌신과 도덕주의적 관점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사치와 방종이 사회와 경제를 파멸로 이끌며, 궁극적으로 종교적 구원이 인간 조직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보았습니다.
• 과학적/합리적 사고와 한계: 그는 논리와 관찰을 사용하여 사유했지만, 연금술, 점성술, 예언 등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믿음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철학을 종교에 해롭다고 보았으며, 인과관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현대적 관련성 논쟁: 이븐 할둔의 이론적 모델과 결론은 현대 사회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지만, 그의 사회를 이해하는 강력한 이론적 모델을 창조하려는 시도 자체는 현대 사상가들과 비교될 가치가 있습니다.
이븐 할둔은 당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독창적인 천재였지만, 동시에 철저히 전통적인 무슬림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저술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넘어 사회 조직의 근본적인 법칙을 이해하려는 심오한 시도였으며, 이는 후대에 걸쳐 다양한 문화적, 학문적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영감을 주었습니다.
질문3 : 14세기 마그레브 사회의 쇠퇴와 변화가 이븐 할둔의 역사관과 사상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14세기 마그레브 사회의 쇠퇴와 변화는 이븐 할둔의 역사관과 사상에 깊이 반영되었으며, 그의 주요 저작인 『무깟디마(Muqaddima)』와 『이바르(‘Ibar)』에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14세기 마그레브 사회의 쇠퇴와 변화의 배경:
• 고대 유적과 폐허: 이븐 할둔은 북아프리카에 널리 퍼져 있는 웅장한 고대 유적들(예: 키레네, 카르타고 등)을 보며 자랐습니다. 이 지역은 과거에는 번성하고 인구가 많았으나, 그의 시대에는 폐허가 되어 있었기에, 그는 이러한 웅장함이 어떻게 황폐함으로 변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는 그의 역사 이론의 시발점 중 하나였습니다.
• 흑사병의 재앙: 1348년부터 1349년까지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흑사병은 이븐 할둔의 부모와 친구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습니다. 이 엄청난 재앙은 그로 하여금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성찰하고 『무깟디마』를 저술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는 필연적인 죽음과 덧없음에 대한 그의 관점을 강화했습니다.
• 정치적 불안정 ("왕좌의 게임"): 알모하드 제국의 붕괴 이후, 마그레브는 하프시드, 메리니드, 압드 알-와디드 왕조들 간의 영토 재통합을 위한 길고 결론 없는 투쟁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장자상속의 원칙이 없어 끊임없는 왕위 다툼이 벌어졌고, 이는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븐 할둔 자신도 행정가, 외교관, 궁정인, 교사로서의 경력 동안 이러한 불안정한 정치 환경에 깊이 관여했으며, 여러 차례 투옥되고 충성심을 바꾸는 등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당대의 혼란을 직접 겪었습니다.
• 유목민의 영향력: 아랍 및 베르베르 부족들은 지배 왕조를 세우고 파괴하는 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븐 할둔은 11세기 바누 힐랄과 바누 술라임 부족의 침략이 이프리키야(Ifriqiyya)에 황폐함과 인구 감소를 가져왔다고 묘사하며, 이를 "메뚜기 떼"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직접 이 부족들과 협상하고 때로는 이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등 유목민의 역동적인 힘을 가까이서 경험했습니다.
• 경제적 쇠퇴: 마그레브의 경제적 쇠퇴는 흑사병 이후의 인구 감소와 사하라 횡단 금 무역로의 쇠퇴와 같은 요인 때문이었습니다. 이븐 할둔은 통치자들이 무역에 관여하고 독점을 설립하는 것에 반대하며, 이는 경제에 해롭다고 보았습니다.
• 도시의 도덕적 타락: 그는 도시 생활이 분업화와 번영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사치, 부도덕, 탐욕, 부패를 조장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의 쇠퇴로 이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이븐 할둔의 역사관 및 사상에 반영된 모습:
• 사회 연대 (아사비야, ‘asabiyya)와 순환론적 역사 이론: 이븐 할둔 사상의 핵심은 『무깟디마』에 500번 이상 등장하는 아사비야(‘asabiyya) 개념입니다. 그는 유목민 부족들이 사막의 혹독한 환경에서 필요에 의해 강력한 '아사비야'(집단 연대)를 발전시키며, 이들이 기존 왕조를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정복자들은 3-4세대가 지나면 도시의 사치스럽고 부드러운 생활에 물들어 '아사비야'를 상실하고 퇴폐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새로운 유목민 부족의 공격에 취약해지고, 결국 왕조가 멸망하며 역사의 순환이 반복된다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이 이론은 북아프리카의 알모라비드 및 알모하드 왕조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는 데 잘 적용된다고 보았습니다.
• 비관주의와 도덕적 메시지: 그는 당대 아랍 역사가들과 마찬가지로 비관적인 시각을 가졌으며, 인류의 진보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역사 저술은 "경건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으며, 현재의 타락을 초기 이슬람과 이슬람 이전 아랍 전사들의 금욕적이고 엄격한 생활과 대조하며 "옛날이 좋았다"는 식의 역사적 통념을 반영했습니다. 그는 폐허를 통해 죽음과 부의 허무함에 대한 도덕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 이바르 (교훈/경고): 그의 저서 『키탑 알-이바르(Kitab al-‘Ibar)』의 제목 자체가 "경고의 서이자 시작과 역사적 정보의 모음"이라는 뜻으로, 과거의 사건들로부터 얻는 교훈과 경고를 강조하는 그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이 무슬림의 구원을 위한 교훈으로 작용하며, 이 세상은 "하찮고 덧없는 것"이며 "죽음과 소멸로 끝난다"고 보았습니다.
• 사회 조직 및 경제적 통찰: 그는 비록 당시에는 경제학이라는 독립된 학문 분야가 없었지만, 『무깟디마』에서 경제 문제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루었습니다. 노동 가치론을 예견하는 듯한 "이윤은 노동에서 실현되는 가치"라는 주장이나, 인구 밀도와 번영의 관계, 사치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그의 분석은 당대 사회와 경제 상황에 대한 심층적인 관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회적 위신(jah)이 경제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그의 생각 또한 당시 사회상을 반영합니다.
• 합리주의와 그 한계: 이븐 할둔은 이람의 기둥 도시, 알렉산더 대왕의 잠수정 이야기, 하룬 알-라시드의 음주 습관 등 과장된 역사적 일화들을 비판할 때 논리와 상식을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합리주의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태양의 열에 대한 독특한 견해나 마법과 점술, 꿈의 현실성에 대한 믿음은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신념들을 반영합니다.
• 신앙 중심의 역사 이해: 그의 분석 기저에는 강력한 신학적 틀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조의 흥망성쇠를 신의 계획의 일부로 보았으며, '아사비야' 역시 신의 도구 중 하나라고 믿었습니다. 사회 조직의 궁극적인 목적은 종교적 구원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그의 역사 이해에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