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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북의 경제력 차이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bus333 2016. 11. 2. 12:12






Industrial Triangle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북부 3대장
토리노-밀라노-제노바

(튀린-밀란-제노아)


이 지역은 유럽내에서도 부자동네로 손꼽히는 지역입니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그렇게 잘 나가던 곳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에 보통 '북부 이탈리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북부 이탈리아(Northern Italy)은 보통

'Il Nord',  혹은 'Alta Italia' 라 칭합니다.

8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860년 이탈리아는 그때까지 매우 다양하게 병존했던 여러 지역과 부족 및 경제단위와 정치체제들을 통합함으로써 하나의 민족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단 하나의 회의적 시각(현 북부의 분리주의 운동을 칭함)을 제외하면, 30-40년 내에 이른바 "이탈리아 인"이라는 민족 정체감을 지닌 용어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단일한 공동사회가 하나의 국가와 정부 또는 하나의 의회와 시민사회 기제의 테두리 안에서 재발견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갖가지 형태로 나누어져 있던 소국들의 옛 이름은(롬바르도-베네토(Lombardo-Veneto)왕국, 사르데뇨-피에몬테(Sardegno-Piemonte), 파르마(Parma)와 모데나(Modena) 공국, 토스카나(Tosc ana) 대공국, 교회 국가, 그리고 시칠리아(Sicilia)의 두 왕국) 점차 통일국가 내의 지역 명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남부와 북부의 구별은 반대로 지리적 구분에 그치지 않고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및 사회적 분리의 형태로도 발전해 갔다. 


http://jungbyungkee.net/polecoso/italia/sales.htm


예를 들어 '롬바르디아'라 칭한다면 현재는, 북부의 롬바르디아 지역을 일컫는 것이지만, 과거에는 롬바르디아 공국을 칭하는 말이였다는 뜻입니다.

* 이탈리아에 관한 지리적 글을 이해하려면, 이탈리아 지역 이름과 위치는 알아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1.. Valle D'Aosta, 2, Piedmont, 3, Liguria, 4. Lombardia, 5. Emilia-Romagna, 6. Veneto, 7. Friuli-Venezia Giulia, 8. Trentino-Alto Adige/Südtirol


이중에서 토리노가 있는 Piedmonte / 밀라노가 있는 Lombardia / 제노바가 있는 Liguria

는 꼭 외워두세요~~





참고로, 원래 롬바르드는 북쪽 엘베강 근처 살고 있던 민족인데
5~6세기경에 현재의 포강 유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 Encyclopedia of European Peoples (Regional History on File) (2006) - 495page





로마의 GDP를 100으로 했을때, 밀라노, 토리노, 나폴리와 비교한 수치입니다. (2013년 기준)

이탈리아에서 경제 중심지는 밀라노입니다. 

(축구팀도 무려 2개, 인터밀란, AC밀란)




2007년을 기준으로 2014년과 비교한 이탈리아 남과 북의 경제 비교입니다.






Cassa del Mezzogiorno (English: Fund for the South)

* EU 28개국 대비 이탈리아 지역별 1인당 GDP 비율


https://www.ft.com/content/cfb06c5e-ada1-11e6-9cb3-bb8207902122

* 산타 크로체님 블로그에서 슬쩍 했습니다.^^





"Padania" is an alternative name for the Po Valley, a major plain in the north of Italy.

(Padania는 북부지방을 포괄적으로 부를때 쓰는 말인데, 

북부 독립과 관련해 사용하는 매우 정치적인 용어입니다)


The geographical imaginary of Padania, northern Italy
출처 : Key Concepts in Historical Geography by John Morrissey (2014) - 70page



한마디로 남북의 경제가 이렇다는 얘기입니다.

북부(Padania)가 황금 알을 낳고
로마 중앙정부가 받아 다 함께 나눠 먹고 있다는 얘기죠.








아뭏든, 이 지역은 언제부터 잘 살게 된 것일까요?


지리수업시간에는 다른 내용은 다 빠지고


'알프스의 수력을 이용해 일찍이 공업이 발달하였다'

라는 표현을 하곤 하는데,


일찍이는 언제부터일까?



그리고 공업발달에는 어떤 입지조건이 작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갑자기 궁금병이 도졌습니다.

앞에 GT(Grand Tour)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다가 호기심이 발동했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하겠네요






호기심을 유발한 앞의 포스팅

자동차에 흔히 붙는 이름 'GT'는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Spread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저 빨간색 동그라미는 좀 이따가 얘기할 주제니까 미리 주목을^^)

The World Economy - Geography, Business, Development (6th) by Frederick P. Stutz (2011) (Pearson) - 39page



산업 혁명은 위의 지도처럼 퍼져갔다고 합니다.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Modern Europe - Volume 1, 1700-1870 by Stephen Broadberry, Kevin H. O'Rourke (2010) - 244page


 
1800년을 기점으로 유럽전체의 도시화율이 급상승하기 시작합니다.
1850년을 중심으로 분석해본다면
S로 표현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은 아직도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는 반면
C로 표현된 독일, 프랑스의 상승률은 매우 높아
20세기 초반에는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 상상이 됩니다.

도시화율과 산업의 고도화는 비례관계에 있다는 가설아래
아마, 이탈리아는 선진국인 '프랑스'와 '독일' 과의 협력(?)이 절실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이탈리아 산업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참고로, 나폴레옹 집안이 원래 제노바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본국 발음으로는 '나폴레오네 디 부오나파르테'

1800년 마렝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북이탈리아 먹어버림 

1801년의 저 그림이 알프스 넘는 나폴레옹 임









이번에는, 지리적인 측면에서 조금 살펴본다면

'Spread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지도에서
이탈리아쪽을 유심히 보면



프랑스 동부 쪽(리옹 인근)에서 알프스를 넘어 토리노(튀린), 밀라노(밀란)을 거쳐 
로마 인근에 주요 공업지역을 만들어 냅니다.

어떻게 저리 험준한 알프스를 쉽게 넘을 수 있었을까?
새로운 문물이 확산될 때는 험준한 산맥 보다는 평야나, 물길을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런데, 제가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스위스는 알프스에 의한 고립지가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뚫인 십자로 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증거가 앞에서 다룬 'Grand Tour의 경로'입니다.
저의 이탈리아 북부에 대해 관심도 실은 GT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젊은이들을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고간 Grand Tour의 경로를 보면

제네바에서 토리노로.

(왜 구지 험준한 알프스를 넘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 경로를 구글로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물론 케바케(case by case)이지만, 돈좀 있는 집 자식들은
프랑스 남부에서 배타고 이동을 하기도 했더라구요.
산넘기는 힘들쟎아요 ㅠ.ㅠ


위 지도는 프랑스, 스위스와의 통로만 나오는데, 하나 빠진 것이

'취리히-루체른-밀라노'를 통해 독일과의 소통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탈리아가 손잡고 싶어하는 프랑스, 독일과의 교역은 바다(제노바가 담당) 뿐만 아니라

내륙으로도 가능하다는 점을 제가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지리 선생님이라면,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더 생겨야 정상일 것입니다.


육상 이동량이 감히 바다의 교역량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이건 좀 이따 말씀드리도로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알프스는 이탈리아와 유럽에게 있어 큰 장애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네바-토리노는 지질 구조선을 따라 길이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스위스야 말로,

알프스 산맥때문에 고립된 것이 아니라

유럽 중앙의 Cross road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남유럽과 북유럽의 교역에 있어서는 핵심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The Geography of Transport Systems by Jean-Paul Rodrigue (2006) - 10page


서기 200년 로마의 주요 교통로 입니다

알프스는 큰 장애물은 아니었던 것 같죠?




알프스가 지독한 지리적 장애물이 못된다는 다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1494년의 이탈리아 지역 지도를 보면
사보이 공국(Duchy of Savoy)은

샹베리-토리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이 둘간의 소통은 어느정도 수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는 샹베리가 사보이 공국의 수도)
- 알프스가 완벽한 장벽의 기능은 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알프스의 통로를 따라

산업혁명의 파동은 알프스를 넘어와 근대적 공업의 씨앗을 뿌립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에 들어온 공업은

아직까지, 수력을 이용하는 공업의 형태였습니다.




a. Overshot wheel, Müller (1899)                            b. Breast wheel, Fairbairn (1876)




c. Undershot (Zuppinger-) wheel, Müller (1899)                           d. Stream wheel, Müller (1899)



현대적 방적기(실을 뽑는 기구)  cf : [방직기 : 천을 짜는 기구]


과거에는 수력을 이용한 물레방아 방적기를 사용함.


훗날, 수력이 증기기관으로 대치 됨






산업혁명이 일어난 동기는 증기기관(1775년)의 발명이었지만, 이후 연달아 중요한 발명이 몇 가지 있었다. 
면사(綿絲)나 명주실을 뽑아내는 방적기(紡績機), 
방적기로 뽑은 실로 천을 짜는 방직기(紡織機)의 발명, 
발전기와 전지의 발명, 자동차의 발명 등이 대표적이다.


방적기와 방직기의 탄생


옛 사람들은 물레를 손으로 돌려 겨우 1가닥의 실을 뽑아야 했다. 
영국의 제임스 하그리브스(James Hargreaves 1720-1778)는 이런 물레를 보고, 1767년 한번에 8가닥의 실을 뽑을 수 있는 기계(방적기)를 발명했다. 
그는 연구를 계속하여 나중에 80가닥의 실을 동시에 뽑는 방적기(‘제니 방적기’spinning jenny 라 부름)를 개발했다. 
이 방적기가 나오자 방적업자들은 실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어 좋아했다.

그러나 근처의 방적업자들은 대량생산하는 업자들 때문에 소규모인 자기들 사업이 망하게 생겼다고 화를 내며, 
하그리브스가 만든 방적기를 파괴해버리면서 소동을 벌리기도 했다.


하그리브스의 방적기를 더 발전시킨 사람은 영국의 리차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 1732-1792)였다. 
그는 물레방아(수차 水車)의 힘을 이용하여 힘들이지 않고 방적기를 돌리도록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력 방적기로 실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자, 실과 함께 옷값도 싸졌다. 
그 후 증기기관이 발명되자, 방적기는 수차 대신 증기관이 돌리게 되었고, 
방적기술은 발전을 거듭하여 완전히 기계화가 이루어졌다.


방적기로 실을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천을 효과적으로 빨리 곱게 짜는 방직기술이 절실해졌다. 
이때 영국의 에드문드 카트라이트(Edmund Cartwrite)가 동력을 사용하여 연속적으로 베를 짜는 기계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1778년에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천을 짜는 방직기를 발명하고 특허를 얻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방적업(紡績業)과 방직업(紡織業)은 소규모의 가내공업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자동기계가 나오면서 실을 뽑고 천을 짜는 공장은 대규모의 공장으로 변해갔다. 
방직기술이 먼저 발전한 영국은 그들의 제품을 세계에 수출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출처] 도구가 발달되어온 과정|작성자 전파과학사

http://blog.naver.com/siencia/220276563352







산업 혁명은 먼저 대중의류로서 큰 판로를 갖추고 있던 면방직 공업 부문에서 일어났다. 영국의 면방직 공업은 17세기에 대륙에서 건너 온 것인데, 처음에는 가내 수공업 형태를 취하였으나, 18세기부터는 매뉴픽처에서 선대 제도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면방직 공업국으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인도의 면포에 압도 당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에서 면작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대량 생산을 위한 기술 개발이 요구되었고, 이에 1764년에 하그리브스가 제니 방적기를, 1768년에는 이발사 아크라이트가 수력 방적기를 발명하였다.

 

그리고 1779년에는 크럼프턴이 앞의 두 방적기를 절충ㆍ개량한 뮬 방적기를 개발하였는데, 이로써 방적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목사 카트라이트는 방적의 대량 생산에 의해 장차 직포업이 번영할 것을 예상하고 1787년 말을 이용해 직기를 움직이는 역직기를 발명하였다. 뒤를 이어 이를 증기기관으로써 움직이게 되어 나폴레옹 전쟁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그리브스에서 카트라이트에 이르는 이 발명들을 방직 공업의 4대 발명이라 일컫는다. 이상의 작업기는 모두 말이나 수력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공장은 대개 냇가에 세워졌다.

 

따라서 이러한 제한을 받지 않고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동력의 발명이 시급하였다. 이에 응하여 나타난 것이 1769년에 발명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다. 하지만 증기기관은 제임스 와트에 의해 처음으로 발명된 것은 아니었다.  증기기관 그 자체는 이미 17세기 초에 발명되어 광산의 양수 펌프 등으로 쓰이고 있었는데, 와트는 이를 개량하여 동력 기관에 응용한 것이었다. 방적업에 증기 기관이 쓰이고 되면서부터 영국의 면방직 공업은 혁명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공업의 발달로 인하여 공장의 원료와 생산품의 수송을 위한 교통 기술의 혁신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결과 도로 포장ㆍ운하ㆍ항만ㆍ교량의 건축 기술도 증기 기관과 함께 진보하였다. 영국의 기관공 스티븐슨은 1814년에 기관차를 발명하였고, 그 뒤 개량을 거듭한 끝에 1829년에는 그의 기관차 로켓호가 리버풀에서 멘체스터 사이에 부설된 철로를 달리게 되었다. 한편, 이보다 먼저 미국의 풀턴이 1807년에 기선을 발명하여 허드슨 강을 시속 4노트로 달렸는데, 이 기선은 그 뒤 개량되어 1819년에는 대서양을 29일만에 횡단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19세기는 '증기 기관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출처] 영국의 산업 혁명|작성자 집에갈래

http://blog.naver.com/jjanga1179/130010287859




1890년대 이탈리아 공업의 핵심은

수력을 필요로 하는 방적업(실뽑기), 방직업(천짜기) 였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입지는 흐르는 물을 구하기 쉬운

알프스 골짜기 근처였을 것 입니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을 하고 나서 부터 1890년까지의

북유럽에서 불어온 산업화의 영향은 고작해야 물레방아 돌리기 수준(가내 수공업)에 불과 했습니다.


또한,

이런 가내 수공업을 벗어난 형태의 공업에서는

수출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국제 교역을 위한 항구도시의 필요성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지리책에서 흔히 말하는

"알프스의 수력 이용"은 물레방아 돌리기 좋은 입지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 합니다.

(1861~1890년대 까지는 말이죠)




하지만 알프스의 수력 이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격적으로 알프스의 수력이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수력발전이 가능해지면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기 시작합니다.


Italy's Ridracoli dam : 이탈리아 북부의 알프스 경계지역은 수력발전에 유리합니다.





< hydropower, the first plant in Europe was built in Paderno d'Adda in Lombardy between 1895 and 1898>

위키피디아에서 어떤 곳은 저 수력 발전소가 최초라고 하고, 어떤 자료는 더 빠른 것이 있기도 하고..??
더 알아봐야 할 듯합니다만.....


지형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저 호수는 빙식곡이 터미널 모레인에 막혀 형성된 호수 같군요.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Modern Europe - Volume 2, 1870 to the Present by Stephen Broadberry, Kevin H. O'Rourke (2010) - 75page



참으로, 의미심장한 표입니다.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아래와 같습니다.


A(석탄생산량), B(선철 생산량)를 보면 이탈리아는 순위권안에 없습니다.

당연하죠. 이탈리아는 제대로 된 지하자원이 없습니다.

포강 유역에서 나오는 천연가스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자원 하나 없는 나라가 이탈리아 입니다.






여기 부터가 중요합니다.


C. (Sulphuric acid, 황산) 생산량을 보면

1890년부터 생산을 시작해서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량이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황산이 뭔데 중요하다고 호들갑이냐???


왜냐면 질소질 비료의 핵심 물질이 황산이기 때문입니다.


식물 생장에 필요한 대부분 물질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질소질 양분은 인간이 만들어낸지 얼마 안되는 신물질였던 것입니다.


왜 못만들어 냈느냐면

황산의 대량 생산에는 고온, 고압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자연상태에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기의 발명은 그런 상태를 만들어

황산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하였던 것입니다.


노구치가 흥남비료공장 입지를 함경산맥 아랫자락에 고른 이유(장진강, 부전강 발전소)와

알프스 밑자락에 중화학 공업단지가 들어서게 된 이유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알프스의 수력 자원"은 

단순히 물레방아 돌리는게 아니라

전력발전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기술과 자본의 결합체인
초기의 중화학 공업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국가내 내수용 경제로 끝날 것이 아니라
싼 전기 생산이라는 잇점을 내세워 질소질 비료를 수출할
거대 항구의 필요성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이탈리아에게는 산업 혁명의 '피'와 '살'이라 할 수 있는
'철광석'과 '석탄'이 없었기에

큰 항구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져
제노아(제노바)의 몸값이 올라가게 됩니다.




출처 : Innovation and Italy's Chemicals Industries

Ciocca, P.,and G.Toniolo, "Storia Economica d'Italia," Editori Laterza, Roma-Bari,Italy (2004).


이 내용은 이탈리아의 화학산업의 역사에 관한 출판물의 본문중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접근성의 우수함이 이 지역을 화학공업의 메카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접근성의 우수성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해보면


(1) 공장은 알프스의 수력발전소와 멀리 떨어질 수 없음 (에너지 지향 공업)

(2) 땅이 평평해 철도와 도로 놓기도 편해서 항구 도시까지 도로나 철도를 놓는 것은
이탈리아 내, 다른 지역보다
식은 죽먹기 임.

(3) 큰 수요 시장인 프랑스, 벨기에 등에 대량 수출을 위해서는 항구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제노바까지의 교통 네트워크가 북부 이탈리아가 좋았음.





1898년(고종 35년) 토리노의 공장 사진

캠브리지 경제사책에서는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Modern Europe - Volume 2)
이탈리아 경제 발전은 1890년 정도부터 조금씩 문명화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로마인근 Terni의 철강공장 (1912년)>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Modern Europe - Volume 2, 1870 to the Present by Stephen Broadberry, Kevin H. O'Rourke (2010) - 33page


'독일>러시아>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헝거리>>>>>이태리'



첫술에 배 부를 순 없겠죠.
1914년 경제 상황을 보더라도
서구 선진국을 따라 잡으려면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이후 이탈리아 경제사는 세계 1차, 2차 대전과 관련지어 설명을 해야하는데
이는 지리적 관점에서는 벗어나므로, 이 뒷일은 생략하고 여기서 글을 대충 마치려 합니다.

여기서 부터는 보너스 입니다.





"북부 이탈리아 공업입지의 요인은 무엇이였을까?"


를 한방에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출처 : Key Geography: Places by David Waugh, Tony Bushell - 75page



그림에서 설명하는 'Industrial Triangle' 의 입지 장점을  요약해보면




1. 프랑스, 영국, 독일과의 접근성이 좋아서


2. 북부 지역으로의 터널이나 길이 발달해서


3. 알프스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유속이 빨라 수력발전에 유리함


4. 천만이 넘는 인구는 노동력 뿐만 아니라, 많은 수요도 만들어냄
- (2011년 기준으로는 2700만명 거주)

- 인구 관련 내용은 19세기말 ~20세기초 Italian Diaspora와 관련해서 더 살펴봐야함.


5. 충적토가 많아 양분이 많고, 평평하며, 기후도 좋아 농사에 유리함


6. 대규모의 농업 패턴은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냄


7. 제노바(제노아)를의 항구와 공항을 통한 수출이 유리함.


8. 북쪽의 알프스, 남쪽의 지중해를 끼고 관광 산업의 기회가 많음


9. 평야가 발달해 도로, 철도 네트워크가 발전함.


10. 공장이 들어서기 좋은 평평한 땅이 많음


11. 토리노에는 지동차 산업에 14만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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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격차 이외에도 북부와 남부를 갈라 놓은 요소가 한가지 더 추가되었습니다.


바로, 이민자 입니다.


2018년 3월초에 있었던 이탈리아 총선에서 '오성운동'이 득세할 수 있었던 이유중에 하나가 바로 이민자였습니다.



출처 : The Wall Street Journal - 2018.03.08










더 읽어 볼 꺼리








 경쟁력 잃은 '남부 식민지'




19세기 통일왕국 건설기부터 갈등 싹터… 유럽연합 탄생으로 남부 필요성 의심



이탈리아 남북부 문제의 기원은 1860년 통일왕국 건설기로 거슬러올라간다. 

통일 이전까지 남부는 북부보다 오히려 부유했다고 한다. 농업과 이를 기반으로 한 가공산업 등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통일은 당시 성장하는 세력으로 떠오르던 북부 산업부르주아지의 주도로 이뤄졌다. 

통일을 주도한 정치세력도 북부 피에몬테주에 있었다.



통일 이후 이탈리아 중앙정부는 북부 산업부르주아지의 이익 중심으로 국가개발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남부는 북부 산업자본의 소비시장, 저렴한 노동력 공급기지로 전락하면서 낙후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런 측면들 때문에 이탈리아 남부문제를 연구하는 ‘남부론자’들은 종종 “남부의 저발전은 북부에 의한 착취 때문”이라며 

“남부는 북부의 내부 식민지였다”고 종종 결론짓는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이후 집권한 구기민당 세력은 남부의 산업을 발전시키기보다는 금전을 투하하는 직접 지원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남부에 대한 지원을 담당하는 남부개발기금이라는 기구가 설치돼 가동됐다.



그러나 남부개발기금은 저발전 지역의 개발전략 가운데 최악의 사례로 기록됐다. 

남부개발기금을 통해 집행되는 공공사업비의 상당액은 실제 사업보다는 중간 단계, 

즉 사업을 따낸 과정에서 로비를 한 정치인과 그 배후의 마피아 수중으로 흘러들어갔다. 

도로가 엄연히 있는데도 마피아 사업가의 요구에 따라 길 하나를 옆에 더 닦는다며 사업비를 타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남부 주민들도 이런 관행에 어느 정도 길들어진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남부 주민들은 집권 기민당에 정치적으로 종속돼 분리나 산업개발을 주장하기보다는 기존의 기금 지원제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측면 때문에 구공산당은 남부개발기금식의 남부지원 사업을 “기민당의 돈주머니를 불리는 일”로 규정하고 반대했다. 

부패의 전모는 92년 마니풀리테 운동이라고 불린 대대적인 정치권 사정을 통해 드러났다.



90년대 들어 북부에서 분리주의가 대두한 것은 유럽연합의 확대발전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북부의 산업부르주아지들은 소비시장으로서의 남부의 존재 필요성을 더이상 느끼지 않게 됐다. 

유럽 단일 시장이라는 더 큰 시장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경제발전 정도가 낮은 남부는 오히려 이탈리아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데 따른 장애물로 인식했다. 

실제로 북부동맹쪽은 유럽 화폐통합 문제 등과 관련해 “자격을 갖춘 지역이 먼저 가입하고 

남부는 실력이 되는 대로 나중에 들어오면 될 일인데, 남부 때문에 발목잡힐 이유가 없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9.html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Modern Europe - Volume 2, 1870 to the Present by Stephen Broadberry, Kevin H. O'Rourke (2010) 






Fabric industry - WATER WHEELS AS A POWER SOURCE.pdf

Innovation and Italy's Chemicals Industrie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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