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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아랍세계의 윤곽을 만든 Sykes-Picot Agreement

bus333 2016. 6. 1. 13:38

고등학교 세계지리 수업을 하시는 분이시라면

위의 지도가 어느 용도로 사용되는지 금새 짐작하실 겁니다.

 

'민족'과 현대의 '국경'이 달라 분쟁이 잦다

뭐 이런 소리를 하고 싶을 때 저 지도를 자주 갖다 쓰곤 합니다.

 

왜 항상 민족-국경 사례에서 아프리카만 인용하고

서남아시아에 대해서는 별로 안 다루는지...

좀 섭섭한 것도 사실입니다.

 

(매체에서 접하는 빈도는 서남아시아가 더 높은데,

그 지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슬람', '사막', '석유' 뿐이니

관심도 가지 않고, 이해도 안되고 -> 무한 반복)

 

 

 

 

 

지난주 The Economist에 'Unintended consequences'라는 제목의 조그만 기사가 났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The Sykes-Picot carve-up led to a century of turbulence' 입니다.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혼란의 원인이라는 얘기)

 

이런 내용을 알고 서남아시아 수업에 임한다면 학생들 앞에서 자신감이 생길 듯합니다.

 

이 기사에 실린 그림이 아래 지도입니다.

 

이 지도에서 언급되는 국가들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입니다.

이들과 아랍세계의 연관성을 찾아야 서남아시아 수업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일단, 위의 지도를 보면 의심스러운 국경선이 있습니다.

시리아와 이라크 사이 국경은 일직선이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국경선이 직선이 많은 이유와 비슷할테죠.

(물론, 요르단-이라크/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도 직선입니다)

 

이건 누가 봐도 인위적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2016년 현재는 IS의 탄생으로 의미 없는 선으로 다시 회귀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의미없는 국경선 얘기는 아래 링크를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하나의 이라크’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위 지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 사이트를 꼭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오스만 투루크 제국과 아랍 독립운동"

 

 

 

 

 

자세한 내용은 세계사 시간에 다뤄야 할지, 세계지리 시간에 다뤄야 할지 모르겠지만

글로벌 시대에 꼭 필요한 내용이라

한번 간략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스만 투루크 제국과 아랍 독립운동"

 

위 사이트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러시아는 발칸반도와 흑해 연안을 갖는게 소원 <-> 고로, 자연스레 오스만제국과는 원수
그런데, 오스만제국 혼자 러시아와 대적하기는 무리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의 힘을 빌려 영토를 보존하기를 원함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제국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점진적으로 먹어들어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
(1830년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알제리를 합병)


오스만제국이 호구라는 소문이 나자, 주변 들고양이들이 다 달라붙음 (오스트리아헝거리 제국, 이탈리아 가세)
(1911년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먹어버림)

오스만제국의 변방지역들이 영국 프랑스에 의해 식민화 되어가는 가운데,

이집트는 무함마드 알리가 등장해 독립국가 형태를 갖춤.

알리의 개혁정책중 하나가 수에즈운하 만들기 였는데,

이 때문에 프랑스에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됨.


이집트가 프랑스에 진 빚이 있어 사실상 프랑스 영향권에 있었으나,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패해서 힘못쓰는 사이 1876년 영국이 홀라당 먹어버림.
오스만투르크-영국 사이 국경선이 현재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직선)임.

 

 

요약

오스만투르크는
프랑스에겐 알제리를, 영국에겐 이집트를, 이탈리아에겐 리비아를 뺐김.

 

 

 


그러다, 시간은 흘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 당시 오스만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악감정이 많음.


주변국들중 그나마 믿을만 한 것은 새롭게 떠오르는 '독일'밖에 없음.
그래서 오스만제국의 군부(이 당시는 군부가 실세, 술탄은 꼭두각시)는 독일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였음.


게다가 독일의 지원으로 오스만제국 군대가 현대식 군대로 변신하게 됨.
그리고 자연스런 수순을 밟아 1차 세계대전에 독일편에 가담해서 전쟁에 돌입하게 됨

 

 

 

 

여기부터가 오늘의 하일라이트.

 


감히 영국에 맞서 싸우는 오스만제국을 어떻게 혼내줄까 고민하다가
1. 물리적으로 후려 패기
2. 심리전으로 조지기

 

두가지를 함께 병행하게 되는데,

이중 두번째 심리전이 아랍세계를 현재의 이꼴로 만들어 버림

(김정은이 '삐라'에 관해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랍의 역사를 잘 배워서 인지도 모르겠음)

 

 

오스만제국의 가장 큰 약점이 민족조합임.

종교는 대부분 수니파이지만, 민족 구성이 참으로 복잡함.

그걸 교묘히 조작해서 내부에서 붕괴가 나타나도록 조작질을 한 것이 영국

 

(참고로, 수니 VS 시아의 구분은 오래 되었지만,

1970년대만 하더라도, 이란, 이라크 모두 원리주의자들은 힘도 제대로 못쓰고

세속정치가들이 사실상 통치를 하고 있었으며

수니와 시아 사이에 묵은 감정은 있었지만, 이것을 밖으로 표시하는 것은 터부시 되어있었음.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 전라 VS 경상의 지역갈등 구도가 희미했던 것하고 비슷.

 

하지만 수니 VS 시아 갈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은

모두가 잘 아는 그 국가의 소행임.)


얘기는 흥미 진진해지는데, 뒷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위의 링크를 눌러보시기 바랍니다.
모의고사 감독을 들어가야 해서 오늘은 이만...^^

 

 

 

마지막으로 위의 글에서 생각하는 지리이야기들 입니다.

1. 잘 읽어보면,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은 러시아의 남침 야욕인데,

왜 러시아는 남침 야욕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까?

매우 지리적인 원인이라 생각함.

 


2. 세계지리 시간에 가르치는 인구의 국제 이동을 보면,

독일에 터키사람 유입이 가장 많은 이유중 하나도 이런 것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함


 

3. 왜 시리아에는 이란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아파가 장악하고 있었을까?

바로 지형이라는 특수 장애물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함.



4. 위의 Economist 지도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프랑스 영향권이

왜 레바논부터 시작하는지도 알 수 있음. (종교 영향)
 

 

 

 

 

 

아래 부터는 <네이버 지식인>에서 퍼왔습니다.

 

여기는 초승달지역(메소포타미아)을 어떻게 나눠먹는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입니다.

(영국의 3중 외교가 하일라이트)

 

 
 
Hussein-McMahon Correspondence(후세인-맥마흔 서한) 1915년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이 독일편에 서자, 영국은 오스만제국을 무너뜨리고 석유자원의 보고인 중동을 장악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오스만제국의 방위망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인데요.

즉, 소수의 터키인들이 다수의 아랍인들을 통치하는 오스만제국의 사회구조의 취약점을 노리고

아랍인들을 부추겨 오스만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것이죠.
 
영국의 고등판무관(카이로 총독 쯤 되는 직책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McMahon은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와 메디나를 지배하던 지방 토후세력 Hussein에게 접근하여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약 10여통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의 주된 내용은,

아랍인들이 오스만제국에 반란을 일으켜 1차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승리를 도우면,

전쟁이 끝난 후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약속이었죠.
후세인은 원래 민족주의적인 관점에 입각해 아랍인의 통일된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야망이 있었기에 여기에 동조했고,

아랍대반란을 일으켜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등을 포함하는 비옥한 지방)에서

오스만제국의 세력을 크게 축소시켰습니다.
 


 
Sykes-Picot Agreement(사이크스-피코 협정) 1916년


그러나, McMahon이 Hussein을 거의 꼬득인 시점인 1916년,

영국대표인 Sykes와 프랑스대표 Picot은 아랍대반란으로 거저 떨어진 메소포타미아를 서로 나눠먹는 비밀협정을 맺습니다.
이게 Sykes-Picot Agreement 이며 그 분할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1916년 중동지역의 지배권을 서로 나눠먹은 비밀협정)
 

 


문제는 위 지도에서 FRENCH INFLUENCE + BRITISH INFLUENCE + DIRECT BRITISH CONTROL에 해당되는 땅이

영국이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1915년부터 1년동안 1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굳게 약속했던 보상과 겹치는 것이었죠.


영국에게 속은 아랍인들이 피흘려 확보된 땅을

영국과 프랑스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나눠먹기로 했다는 사실이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공인되고, 이듬해 LN(국제연맹, UN 창설 이전)에서 이것이 공인되면서,

아랍인들은 경악했으며, 아랍민족무장운동 과 같은 폭동과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영국은 폭격기로 폭탄을 쏟아부어 시위대를 학살하는 등 강압통치를 계속했으나 막대한 예산이 소모되었고,

당시 외무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의 제안에의해 토착세력을 활용한 '간접통치' 즉, 아랍인을 국왕으로 앉혀놓고

마치 독립국가가 이룩된 것과 같이 꾸며 민중의 저항을 사그라들게 한 것입니다.

물론 그 국왕들(후세인의 아들들)은 영국 정부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습니다.
 


 
Balfour Declaration(벨푸어 선언) 1917년


팔레스타인 지방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잠깐 3년전으로 돌아가 보죠.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는 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막대한 전비확보+미국의 참전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핵심적 열쇠인 유대인에게 접근했습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유력한 자본가는 모두 유대인들이었거든요...
 
즉, 나라없이 전 세계에 떠돌고 있는 유대인들의 민족국가를 옛 이스라엘왕국의 터전에 마련해주겠다.

그러니 1차세계대전에서 우리가 승리하게 도와달라는 것이었죠.

실제로 연합국의 중추를 이루던 국가에서 유대인들이 차지하던 막대한 자본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영국의 계획대로 된 셈이죠.
 
그런데 또 문제는... 영국이 아랍인에게 약속한 보상과도 겹치는 겁니다.

(프랑스야,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을 뿐더러 국력이 쇄진하여

석유도 안나는 예루살렘 하나 내준다고 발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8년에 이스라엘이 실제로 건국되버리자,

아랍의 극렬한 저항이 시작된 것이죠.
 

 


후세인-맥마흔 서한(1915~1916) 으로 오스만제국을 쉽게 무력화시켰고,
사이크스-피코협정(1916) 으로 아랍인들을 이용해 거저 떨어진 거대한 땅을 나눠먹었으며,
벨푸어선언(1917) 으로 거저 먹은 땅의 일부를 배팅하여 유대인들로부터 막대한 전쟁자금을 조달함.
 
이 세가지를 영국의 3중 외교라고 합니다.

 

 


 

같은 파이를 놓고 서로다른 3 세력에게 그걸 나눠주겠다고 약속해서 서로다는 3 세력의 지원을 이용한 후

결국 파이는 영국내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돌아간 결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즉, Sykes-Picot Agreement에서 특히 예루살렘과 그 주변부(당시 팔레스타인)를

영국과 프랑스가 모두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며 관리한 것은,

영국이 1917년 유대인들에게 이곳을 걸고 전쟁자금을 조달받기위해서였으며,

예루살렘을 무기로 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나요?

 

 

From <네이버 지식인>

 

 

 

 

 

 

위의

첫번째 지도는 '자원-종교-민족' 븐포를 보여주는 지도

두번째 지도는 사이크스-피코 협정 지도입니다.

 

두 개를 중첩해서 잘 관찰하시면

서남아시아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듯 합니다.

 

 

THE MODERN FRONTIERS of the Arab world only vaguely resemble the blue and red grease-pencil lines secretly drawn on a map of the Levant in May 1916, at the height of the first world war. Sir Mark Sykes and François Georges-Picot were appointed by the British and French governments respectively to decide how to apportion the lands of the Ottoman empire, which had entered the war on the side of Germany and the central powers. The Russian foreign minister, Sergei Sazonov, was also involved. The war was not going well at the time. The British had withdrawn from Gallipoli in January 1916 and their forces had just surrendered at the siege of Kut in Mesopotamia in April.

 

Still, the Allies agreed that Russia would get Istanbul, the sea passages from the Black Sea to the Mediterranean and Armenia; the British would get Basra and southern Mesopotamia; and the French a slice in the middle, including Lebanon, Syria and Cilicia (in modern-day Turkey). Palestine would be an international territory. In between the French- and British-ruled blocs, large swathes of territory, mostly desert, would be allocated to the two powers’ respective spheres of influence. Italian claims were added in 1917.

 

어떤 나라가 어디를 어떻게 나눠먹는지를 말해줍니다.

 

But after the defeat of the Ottomans in 1918 these lines changed markedly with the fortunes of war and diplomacy (see map). The Turks, under Kemal Pasha Ataturk, pushed foreign troops out of Anatolia. Mosul was at first apportioned to France, then claimed by Turkey and subsequently handed to Britain, which attached it to the future Iraq. One reason for the tussle was the presence of oil. Even before the war, several Arab territories—Egypt, north Africa and stretches of the Arabian Gulf—had already been parcelled off as colonies or protectorates.

 

그러다 투르크에 케말 파샤가 나타나 이탈리아는 살짝 맛만 보고 도로 반납을 하게 되는군요.

 

 

Even so, Sykes-Picot has become a byword for imperial treachery. George Antonius, an Arab historian, called it a shocking document, the product of “greed allied to suspicion and so leading to stupidity”. It was, in fact, one of three separate and irreconcilable wartime commitments that Britain made to France, the Arabs and the Jews. The resulting contradictions have been causing grief ever since.

 

(영국의 3중 외교를 말함)

 

In the end the Arabs, who had been led to expect a great Hashemite kingdom ruled from Damascus, got several statelets instead. The Maronite Christians got greater Lebanon, but could not control it. The Kurds, who wanted a state for themselves, failed to get one and were split up among four countries. The Jews got a slice of Palestine.

 

The Hashemites, who had led an Arab revolt against the Ottomans with help from the British (notably T.E. Lawrence), were evicted from Syria by the French. They also lost their ancestral fief of the Hejaz, with its holy cities of Mecca and Medina, to Abdel Aziz bin Saud, a chieftain from the Nejd, who was backed by Britain. Together with his Wahhabi religious zealots, he founded Saudi Arabia. One branch of the Hashemites went on to rule Iraq, but the king, Faisal II, was murdered in 1958; another branch survives in a little kingdom called Transjordan, now plain Jordan, hurriedly partitioned off from Palestine by the British.

 

Israel, forged in war in 1948, fought and won more battles against Arab states in 1956, 1967 and 1973. But its invasion of Lebanon in 1982 was a fiasco. The Palestinians, scattered across the Middle East, fought a civil war in Jordan in 1970 and helped start the one in Lebanon in 1975. Syria intervened in 1976 and did not leave Lebanon until forced out by an uprising in 2005. More than two decades of “peace process” between Israel and Palestine, starting with the Oslo accords of 1993, have produced an unhappy archipelago of autonomous areas in the Israeli-occupied West Bank and Gaza Strip.

 

Morocco marched into the western Sahara when the Spanish departed in 1975. The year after Iran’s Islamic revolution of 1979, Iraq started a war that lasted eight years. It then invaded Kuwait in 1990, but was evicted by an American-led coalition.

 

The Suez Canal and vast oil reserves kept the region at the forefront of cold-war geopolitics. France and Britain colluded with Israel in the war against Egypt in 1956 but were forced back by America. Yet America soon became the predominant external power, acting as Israel’s main armourer and protector. After Egypt defected from the Soviet camp, America oversaw the Egyptian-Israeli peace treaty of 1979. It intervened in Lebanon in 1958 and again in 1982. American warships protected oil tankers in the Gulf during the Iran-Iraq war. And having pushed Iraq out of Kuwait in 1991, America stayed on in Saudi Arabia to maintain no-fly zones over Iraq. In response to al-Qaeda’s attacks on Washington and New York in September 2001, America invaded Afghanistan in the same year and then Iraq in 2003.

 

“Lots of countries have strange borders,” says Rami Khouri of the American University of Beirut. “Yet for Arabs, Sykes-Picot is a symbol of a much deeper grievance against colonial tradition. It is about a whole century in which Western powers have played with us and were involved militarily.”

 

결론은, 재주는 곰 (프랑스와 영국)이 부리고

열매는 미국이 많이 따드셨다는 아름다운 얘기였군요.

 

The Economist
May 14th 2016 | From the print edition

 

 

 

 

PS 아래는 쿠웨이트 왕가 얘기인데

이거 읽어보면 '오토만 제국-영국' 틈바구니에서 쿠웨이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쿠웨이트가 영국에게 30년간 원유를 배럴당 2$에 수출한 이유도 짐작할 수 있구요)

 

만약, 1991년 걸프전까지 함께 언급되었다면

'오토만제국-영국-미국'으로 줄타기를 바꿔가면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볼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의회제도를 발전시킨 왕정 국가 쿠웨이트 사바흐 왕가"

 

 

 

 



Turkey’s Ottoman Empire stretched across North Africa, the Middle East, and southeastern Europe.
Although Turks are not Arabs, the Turkish empire was the dominant power in the Arab world until World War I,
when it collapsed, paving the way for the British and French colonialists.


출처 : The World Economy - Geography, Business, Development (6th) by Frederick P. Stutz (2011) (Pearson) - 52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