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6장은 이븐 바투타의 여행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챕터 6 "이븐 바투타의 세계"는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독특한 여행 기록을 통해 14세기 중반 이슬람 세계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븐 바투타의 여정은 1325년에서 1355년까지 약 30년간 지속되었으며, 그의 기록인 《리흘라(Rihla)》는 그가 만난 사람들과 목격한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풍경에 대한 귀중한 증언을 제공합니다.
다음은 챕터 6의 주요 내용입니다:
• 초기 여정: 탕헤르에서 메카, 바그다드까지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
◦ 출발과 배경: 1325년 6월 14일, 이븐 바투타는 말리키 법학 교육을 받은 법학자 가문의 일원으로서 탕헤르를 떠나 메카 순례(하지)와 무함마드의 묘소를 방문할 목적으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그는 육로를 통해 페스, 틀렘센, 알제리를 거쳐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 도착했습니다. 카이로는 인파가 넘치고 모스크와 마드라사(이슬람 학교)가 셀 수 없이 많았으며, 그는 많은 수피 수도원(자와야)에 머물며 그곳의 조직과 순례자 환대 전통을 기록했습니다.
◦ 다마스쿠스: 1326년 8월 9일, 그는 다마스쿠스에 도착하여 우마이야 모스크에 감탄하고,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고 믿어지는 하얀 미나레트 근처를 언급했습니다. 이곳은 맘루크 시리아의 중요한 경제, 정치, 군사 중심지였으며, 그는 두 명의 여성 학자(세이카)를 포함한 여러 학자와 수피 셰이크들을 만났습니다.
◦ 이븐 타이미야와의 만남: 다마스쿠스에서 이븐 바투타는 당대 영향력 있는 법학자이자 신학자인 이븐 타이미야를 만났습니다. 이븐 바투타는 이븐 타이미야를 "매우 존경받고 다양한 학문에 능통했지만, 약간 이상한 사람"으로 묘사하며, 수피즘과 성자 묘소 숭배에 대한 그의 이단적 견해로 인해 투옥되었음을 언급합니다. 이븐 타이미야의 사상은 수세기 동안 잊혔다가 20세기 와하비즘과 살라피즘의 비공식적인 신학자로서 재조명됩니다.
◦ 메카와 메디나: 그는 메카에서 카바 신전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을 신랑이 신부를 처음 보는 순간에 비유하며 상세히 묘사했습니다. 그는 1326년부터 1332년 사이에 세 번의 순례를 마치고 성스러운 도시에서 거의 3년을 보냈습니다.
◦ 이라크와 이란: 그는 이라크에서 시아파 교인들에 대해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이스파한과 시라즈를 방문하며 수피들의 경건한 수행을 존경했습니다. 바그다드에서는 몽골 약탈의 상흔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븐 한발의 묘소를 방문하며 한발리 학파에 대한 신의 비호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 아랍 세계를 넘어선 여정: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 지위의 변화: 1328년부터 이븐 바투타는 아랍어를 이해할 수 없는 비아랍 지역으로 여행하면서 그의 지위가 바뀌게 됩니다. 그는 법과 신학 교육을 받은 아랍인으로서 각 지역 이슬람 통치자들에게 귀한 존재가 되어, 환대받고 많은 선물과 명예를 받았으며 종종 카디(이슬람 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 아나톨리아와 오스만 제국: 그는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부르사를 방문하여 오스만 술탄 오르한 가지의 환대를 받았고, 법학자들이 튀르크인들 사이에서 누리는 지위에 만족해했습니다.
◦ 인도 (델리 술탄국): 인도는 그의 지위가 국가의 대리인으로 바뀐 곳입니다. 그는 델리 술탄국의 술탄 무함마드 이븐 투글루크의 관대함과 궁정의 화려함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술탄의 잔인한 면모(적들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등)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결국 델리의 대 카디가 되지만, 수피 셰이크와의 연루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술탄의 대사로서 중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 선박 침몰과 새로운 모험: 중국으로 가는 도중, 캘커타에서 그의 선물과 소지품을 실은 배가 난파되면서 중국 대사로서의 임무는 실패합니다. 그는 몰디브로 향해 수도의 카디가 되고, 현지 여성들과 결혼하며 몰디브 사회와 문화(여성들의 의상 등)에 대한 관찰을 기록합니다.
◦ 실론과 수마트라: 그는 실론에서 아담의 봉우리를 방문했는데, 이 산은 무슬림, 기독교인, 힌두교도, 불교도 모두에게 성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수마트라에서는 샤피이 법학파의 무슬림 술탄을 만났습니다.
◦ 중국: 그는 취안저우(광저우)에 도착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라고 칭하며 무슬림 거주지를 묘사했습니다. 그는 중국인들이 무슬림을 존경하고 존중한다고 언급했지만, 만연한 "불신앙과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고통스러워했습니다.
◦ 귀향 및 말리 여행: 귀환길에 다마스쿠스에서 흑사병이 유행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 커뮤니티가 함께 기도하는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사하라 사막을 넘어 말리 왕국을 방문합니다. 그는 말리 궁정에서의 미지근한 환대에 불평하면서도, 만사 무사의 순례와 이슬람화 노력을 언급합니다. 그는 여성들의 노출과 식인 풍습 등 일부 아프리카 관습에 충격을 받았으며, 현지 이슬람과 토착 종교가 혼합된 형태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냅니다.
◦ 콘야와 루미: 그는 아나톨리아 콘야에서 메블레비 수피 교단의 환대를 받았으며, 잘랄 알-딘 루미의 삶과 작품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습니다.
• 이븐 바투타의 관점과 성격
◦ 이븐 바투타는 수피 금욕주의를 존경했지만, 자신은 부유한 자들의 환대와 선물, 그리고 여성들의 동반을 즐기는 세속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노예 제도에 대해 거의 공감하지 않았고, 여행 중 많은 노예를 받았으며 때로는 노예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 그는 몰디브나 말리의 여성들의 노출된 모습에 불편함을 느꼈고, 모리타니에서 남녀의 자유로운 교류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시아파에 대해 적대적이었지만, 기독교 수도승의 금욕주의를 수피 금욕주의와 유사하게 보며 존경하기도 했습니다.
◦ 그는 인도 "불신앙자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이슬람 공동체가 힌두 통치하에 있던 지역에서는 걱정 없이 여행했습니다.
◦ 이븐 바투타는 자신의 아랍어 지식, 하디스(예언자 언행록), 법학 지식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이는 그에게 많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태도를 "무슬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신의 교육과 문화가 현지인들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했던 점을 지적합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은 14세기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상품, 사상의 끊임없는 교류가 이루어졌던 문화적 통일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이슬람의 지리적 확산 과정은 아래 책 참조-------------------
Cultures In Motion - Mapping Key Contacts And Their Imprints In World History (2001) Yale Univ
위 책의 6장은 이슬람의 확산과정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6장. 이슬람의 확산과 문화적 융합
• 초기 확산과 매력: 이슬람은 군사적 정복을 통해 주로 확산되었지만, 다른 신앙에 관대했습니다. 무슬림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교로 강제로 개종시키지 않았으며, 종종 소수 공동체에 특별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슬람은 자선과 영적 평등에 대한 헌신 때문에 하층 계층에게 매력적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신념 체계보다 상인 활동을 더 정당화하여 상인들을 끌어들였습니다.
• 무함마드와 꾸란: 약 570년경에 태어난 예언자 무함마드는 가장 새로운 세계 종교의 기본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꾸란은 천국에 접근하고 비참한 지옥에서의 영원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진술을 제공했습니다.
• 지역별 이슬람화
◦ 서아프리카(수단 왕국): 이슬람은 지배 계급을 통해 도입되었고, 다수의 사람들이 이슬람을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서아프리카 전통에 따라 자신을 신으로 묘사하는 것을 계속했고, 여성의 지위와 형벌 등 일부 이슬람 관습은 거부되었습니다.
◦ 동아프리카 해안: 아랍 상인과 선교사들이 이슬람을 전파했으며, 스와힐리 상인들은 아랍어와 무슬림 종교 및 정치 사상을 가져왔습니다. 이슬람은 해안을 따라 상류층의 문화적 단결을 제공했습니다.
◦ 인도: 처음에는 문화적 영향이 미미했지만, 11세기 이후 튀르크족의 정복으로 델리 술탄국이 세워지면서 변화했습니다. 수피 이맘들은 힌두 이야기를 사용하고 힌두 사원 부지에 신사를 세우는 등 문화적 환경에 적응했습니다. 이슬람은 영적 평등에 대한 약속 때문에 전사들과 최하층 카스트 사람들에게 특히 매력적이었습니다.
◦ 동남아시아: 14세기 후반 무슬림 상인과 수피들이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섬들로 이슬람을 가져왔습니다. 15세기에는 해안 도시의 엘리트들이 개종했고, 수피들은 내륙으로 들어가 이슬람을 전파했습니다. 이슬람은 확장되는 무역 시대에 해안 인구와 통합하는 방법으로 내륙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동남아시아' 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동남아시아 이슬람 확산의 개요>
• 시기 및 도입: 동남아시아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가장 마지막 주요 지역으로, 주로 14세기 후반에 도입되었습니다.
• 확산 주체: 아라비아와 특히 인도에서 온 무슬림 무역선들이 무슬림 상인과 수피 지도자들을 말레이반도와 오늘날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섬들로 데려왔습니다.
• 초기 접촉 및 엘리트 개종: 상인들은 해안 도시에서 중요한 접촉을 확립하여 통치 계층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5세기까지 이들 해안 도시의 대부분 엘리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습니다.
• 내륙 확산: 해안 도시에서 수피 지도자들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학교를 세우고 마을마다 설교했습니다.
• 매력 요인: 이슬람은 무역 확장의 시기에 해안 인구와 통합하는 방법으로 내륙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습니다.
• 지리적 범위: 16세기까지 이슬람은 인도네시아 제도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말레이반도와 필리핀 남부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 확산 제한: 16세기 유럽 해군력과 상업적 우위가 도래하면서 이슬람의 확산은 멈추었지만, 이슬람이 후퇴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무슬림 국가입니다.
이슬람과 현지 문화의 융합 (문화적 혼합주의) 동남아시아의 이슬람은 필연적으로 지역 문화적 영향과 융합되었습니다.
• 이슬람 이전 요소 유지: 대중적인 의상, 춤, 축제, 그리고 힌두 서사시에 기반한 뛰어난 그림자 연극과 같은 이슬람 이전의 주요 문화 요소들이 계속 포함되었습니다.
• 수피의 관용: 수피 지도자들은 정통 이슬람 학자들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난다고 여겼을 많은 애니미즘적, 힌두교적, 불교적 신념과 의식을 관용했습니다.
• 법률 시스템: 사회 관계는 이슬람 이전의 법률에 의해 규제되었으며, 종교법은 매우 특정한 유형의 교환에만 적용되었습니다.
• 여성의 지위: 여성은 이슬람 중동보다 더 강한 지위를 유지했으며, 시장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약하자면, 동남아시아의 이슬람은 군사적 정복보다는 상업과 수피 선교 활동을 통해 점진적으로 확산되었으며, 현지 문화와 깊이 융합되어 독특한 혼합주의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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