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The Far Edges of the Known World (2025) Bloomsbury
고대 세계의 변방 지역과 문화 교류
The Far Edges of the Known World - A New History of the Ancient Past (2025)
책의 전체적인 내용
제공된 발췌문은 고대 세계의 가장자리에 대한 역사적 탐구를 보여줍니다. 이 글은 그리스-로마 관점을 넘어선 다양한 문화적 상호 작용과 장소를 탐색합니다. 여기에는 투르카나 호수의 목회자 사회, 이집트와 누비아 국경의 상호 작용, 메기도의 세계적인 무역 연결망, 흑해의 그리스 식민지 올비아와 그 주변 스키타이인들이 포함됩니다. 또한, 코 로아와 탁실라와 같은 동남아시아의 방어 시설과 악숨 왕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전통적인 역사 서술의 경계를 확장합니다.
조금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주요 테마 및 핵심 아이디어
이 문서에서는 고대 세계의 다양한 변방 지역과 그곳에서 일어난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춥니다. 변방은 단순히 지리적인 경계가 아니라, 문명이 만나고, 융합하며, 때로는 갈등하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1. 나일강 상류와 쿠시 왕국 (누비아)
• 초기 정착과 케르마: 쿠시는 "자신의 원주민 언어에서 유래했을 수 있는 가장 초기 증명된 이름"이며, 주요 정착지인 케르마는 수단의 나일강 지류에 위치했습니다. 기원전 약 3000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초기 마을은 1.5헥타르에서 12헥타르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이 공간은 대부분 작은 둥근 집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벽은 진흙과 새시를 사용하여 만들었습니다." 큰 집들은 높은 지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 이집트의 팽창과 부헨 요새: 이집트 중왕국 시대, 특히 세누스레트 1세와 그의 증손자 세누스레트 3세는 남쪽으로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부헨 요새는 "서부 나일강둑에 위치해 있었으며, 외벽은 150미터 x 450미터에 달해 67,500제곱미터의 면적을 둘러쌌습니다." 이 요새는 약 1300만 개의 벽돌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쿠시와의 국경을 확고히 하고 하누비아 지역의 광물 자원을 착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문화적 상호작용과 정체성: 세누스레트 1세의 확장 정책은 이집트 주둔군뿐만 아니라 지역 누비아 공동체에도 국경을 제공하며 의도치 않게 이집트와 누비아 문화가 혼합되는 독특한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리비아인, 아시아인, 누비아인과 같은 주변 민족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의했으며, 이들은 "각 민족은 캐리커처화되고 고정관념화되었으며, 모두 경멸당하고 조롱받았습니다." 하지만 국경 지역에서는 "누비아인들과 다양한 문화권의 누비아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 쿠시의 부상과 누비아의 지속성: 이집트 당국이 요새 시스템을 포기하고 철수했을 때, 국경 지역의 가족들은 "새로운 충성을 맹세하고 평소처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심지어 신왕국 시대에도 아스쿳 요새에서 발굴된 누비아 유물은 전체의 83%를 차지하여 "누비아 국경에서 전면적인 변화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2. 메기도, 이스라엘: 교차로의 역사
• 전략적 중요성: 이스라엘의 메기도는 "3,500년 이상 동안 이 지역을 통과하는 거의 모든 군사력의 통과를 목격했습니다." 이곳은 최소 34번의 주요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싸워진 땅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문명의 층: 메기도 유적은 "수천 년 동안 정착지 위에 정착지가 건설되면서 형성된 인공 언덕"인 '텔'입니다. 고고학자들은 "각 층(stratum)을 식별하고 대략적으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어" 선사시대부터 기원전 1천년 말까지 총 20개의 식별 가능한 정착 시기를 보여줍니다.
•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 최근 연구에 따르면, 메기도에서 발견된 주석 잉곳의 지질학적 연대 분석 결과 "청동기 시대 가나안의 가장 유력한 주석 공급원은 지중해 동쪽이 아니라 유럽 북서쪽, 즉 영국 콘월"이었습니다. 이는 메기도가 "육지와 바다를 가로지르며 현대 영국에서 동쪽으로는 인도네시아와 중국까지 뻗어 있는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에 위치했음을 시사합니다.
3. 올비아, 흑해: 그리스와 스키타이의 공존
• 전략적 위치와 초기 정착: 기원전 6세기에 밀레투스인들이 흑해 무역로를 통제하기 위해 설립한 올비아는 보리스트헤네스(드니프로강)의 풍요로운 자원 덕분에 번성했습니다. "보리스트헤네스는 가장 생산성이 높고, 짐승들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잘 자라는 목초지를 제공하며, 그곳의 물고기는 탁월함과 풍부함 면에서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
• 그리스 정체성의 변화: 올비아는 아고라, 항구, 에클레시아스테리아, 신전 등을 갖춘 전형적인 그리스 도시 국가의 특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올비아는 기원전 5세기에 자체 주화를 발행할 때 "동전의 이미지에 그리스와 스키타이 문화적 가치를 모두 반영"했습니다. 심지어 "올비아 사람들이 스키타이 문화의 일부를 채택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 외국인 통합과 몰락: 올비아는 비올비아인과 비그리스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문화적, 정치적 풍경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스키타이인들도 도시에서 관직을 맡을 수 있게 되었지만,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 "외부 유목민 집단의 정기적인 습격으로 인해 올비아는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결국 올비아는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스키타이 왕 스킬루루스의 통치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올비아가 "그리스 형제들이 아닌, 매일 함께 살던 스키타이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 나우크라티스,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의 그리스 교역소
• 군사적 기원과 다중 모도시: 기원전 7세기에 프삼티크 1세 파라오가 그리스 용병들을 고용하면서 나일강 삼각주에 그리스인들이 정착하게 되었고, 나우크라티스가 설립되었습니다. "다른 외국 땅에 있는 그리스 정착지와 달리, 올비아나 마살리아처럼 나우크라티스는 단일 모도시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오니아와 카리아의 최소 12개 그리스 도시들이 초기 역사에 관여했습니다.
• 문화적 융합: 나우크라티스는 그리스 도시였지만, "그 풍경을 지배하고 그리스 통치자들이 막대한 투자를 한 이집트 신전 단지"인 대규모 테메노스(종교 구역)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이집트 신 아문-라에게 헌정되었습니다.
• 번성하는 교역 중심지: 군사 식민지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나우크라티스는 곧 "나일강 삼각주의 주요 교역항 중 하나로 변모했습니다." 동지중해 전역의 상인들을 끌어모았고, "이집트 시장의 미개척된 부를 이용하려는" 구매자, 판매자, 서비스 제공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5. 빌스크, 유라시아 스텝: 거대한 스키타이 성채
• 압도적인 규모: 기원전 6세기 말에 건설된 빌스크의 요새는 "총 둘레가 33킬로미터 이상이었고, 약 4,800헥타르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는 "제국 로마의 거의 두 배 크기"이며, "대부분 비어 있는 공간"이었지만 그 규모는 인상적이었습니다.
• 그리스 무역의 흔적: 빌스크와 남쪽의 그리스인들, 특히 올비아와의 명확한 무역 연결이 존재했습니다. "장식된 와인 주전자, 컵, 접시와 같은 그리스 도자기는 분명 엄청난 비용을 반영한 고급 품목이었습니다." 그리스 거울, 뚜껑 있는 그릇, 암포라와 같은 다양한 그리스 물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 그리스인 거주 증거: 유적지에서 발견된 그리스어 문자가 새겨진 보석, 방추, 생선 접시, 그리고 현지인들이 사용하지 않던 그리스 램프는 "그리스인들이 빌스크에 실제로, 적어도 일시적으로 거주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고대 세계의 변방에서 문화적 교류가 단순히 물품 교환을 넘어 인적 왕래까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6. 탁실라, 인도: 학습과 제국의 요람
• 신화적, 종교적 중요성: 탁실라는 인도 대서사시인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며, "마하바라타가 탁실라에서 처음 낭송되었다는 전통"이 있을 정도로 "종교적, 문화적 중요성"을 지녔습니다.
• 학문의 중심지: 탁실라는 초기 불교 이야기(자카타)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승들"이 있는 "거의 대학 도시"로 묘사되며, 부처가 과학, 철학, 신학 원리를 배웠던 곳입니다. 탁실라는 또한 의학 학습의 중심지로 유명했습니다.
• 파니니의 영향: 탁실라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학자 중 한 명은 산스크리트어의 첫 공식 문법서인 아쉬타디야이를 쓴 문법학자 파니니였습니다. 그의 작업은 "현대 언어학의 기초"로 간주되며, 그의 추상 기호 사용은 "대수학의 기원"과 현대 컴퓨팅 언어의 "선조"로 연결됩니다.
•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양성: 인도 철학자 차나키야는 탁실라에서 어린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인문학, 과학, 예술뿐만 아니라 법, 군사 과학, 의학과 같은 실용적인 과목에 대한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찬드라굽타는 후에 마우리아 제국을 설립하고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통치자 중 한 명이 됩니다. 이는 변방 지역이 단순히 주변부가 아니라 중요한 지식과 권력의 인큐베이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아소카 대제의 불교 개혁: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 마우리아는 "고대 인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통치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 그의 통치 아래 불교는 마우리아 제국의 국교로 변모하고 "세계 전역으로의 복음적 확산"을 후원했습니다.
7. 악숨,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동아프리카의 기독교 왕국
• 글로벌 무역의 교차점: 악숨은 고대부터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으며, 특히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6세기 비잔틴 수도사 코스마스 인디코플레우테스(Cosmas Indicopleustes)는 악숨을 동방 무역의 중요한 허브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인도 여행을 암시하지만, 고대 및 중세 유럽에서 '인도'는 종종 나일강 동쪽의 아프리카 땅과 아라비아를 포괄하는 포괄적인 용어였습니다."
• 유니크한 지리적 위치: 악숨은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 위치하며,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사이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무역을 위한 전략적인 요충지"였습니다.
• 초기 기독교화와 이슬람과의 관계: 악숨은 4세기 초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왕국 중 하나였습니다. 악숨 왕 칼렙은 6세기 초에 기독교를 박해하는 히미아르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아라비아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의 부상 시기에는 악숨과 이슬람 세력 간에 "강력한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 지역은 "이슬람 확장에서 중립으로 간주"되어 지하드에서 면제되었습니다. 무함마드 자신도 "에티오피아인들이 너희를 내버려 두는 한 그들을 평화롭게 두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8. 로마 제국의 변방: 정체성, 문화, 그리고 제국의 확장/수축
• 하드리아누스 장벽: 정의된 국경: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국경을 의도적으로 축소했지만 더 명확하게 정의하고 지원"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영국을 양분"하며 73마일(117킬로미터)에 걸쳐 뻗어 있었고, "4미터 이상의 높이와 3미터의 깊이"를 자랑했습니다. 이는 군사적 요새일 뿐만 아니라 "명확하게 표시된 국경 지대"를 형성했습니다.
• 로마 군대의 다문화성: "로마"라는 용어는 권력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지만, 이는 "로마 군대가 이탈리아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게 만듭니다."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제국 전역에서 온 약 9,000명의 병사들이 주둔했으며, 이들은 주로 "페레그리네 병사(시민이 아닌 자유민)"들이었습니다. 이는 "로마 점령이 단순히 로마 문화를 영국 제도에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많은 것을 가져왔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하드리아누스 장벽 근처에서 발견된 한 비문은 북아프리카 출신 로마 장교인 마르쿠스 도나티아누스가 다양한 문화권의 신들을 언급하며 군대의 다문화적 구성을 보여줍니다.
• 군인 가족의 생활: 로마 보조군 병사들은 복무 중 가족을 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병사가 제대할 때, 보통 25년 복무 후에는 그와 그의 비공식적인 아내, 그리고 자녀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습니다." 이는 변방 지역에서 사회적 네트워크와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볼루빌리스: 로마화와 현지 정체성의 지속: 모리타니에 위치한 볼루빌리스는 로마 제국의 변방 도시였으며, 로마 문화적 관행을 채택하며 "로마화"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로마식 이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 속에는 "마우리와 푸니 문화유산"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284년에 볼루빌리스를 버렸을 때도, "볼루빌리스는 평소처럼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현지 엘리트들이 남아 있었고, 로마의 철수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번성했음을 시사합니다.
9. 고대 그리스의 정체성과 "야만인" 개념
• 편협한 관점: 헤로도토스와 그의 후계자들 덕분에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 사이를 "그리스 문화의 지배" 시기로 보지만, 이는 "명확한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쓰여진 역사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낫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문헌 자료는 보통 그리스 본토에서 왔거나 고전 아테네의 지적 발전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리스 생활과 그리스 태도에 대한 우리의 많은 가정이 매우 편협한 초점으로 왜곡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 변화하는 정체성: 흑해 지역과 같은 그리스 식민지에서는 그리스 정체성이 유동적이었습니다. 올비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현지 스키타이 문화 요소를 받아들이고 그들과 통합되었습니다.
결론
이 자료들은 고대 세계의 "변방"이 고립되거나 미개한 지역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이들은 다양한 문화가 만나고, 혼합되며, 때로는 갈등하고 협력했던 역동적인 공간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누비아 요새, 이스라엘의 메기도를 통한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 흑해 올비아의 그리스-스키타이 융합, 나우크라티스의 다중 문화적 교역소, 빌스크의 그리스 무역 흔적, 인도의 탁실라가 학문과 제국의 요람이 된 과정, 그리고 로마 제국의 다문화적인 국경 방어와 현지 문화의 지속성은 모두 "변방"이 문명 발전과 정체성 형성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들 지역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를 넘어, 문화적 교류와 정체성 재정의가 활발히 일어났던 살아있는 공간이었습니다.
NotebookLM이 제안한 질문으로 알아본 책의 내용
질문 : What insights do these "edge" communities offer about ancient world cultures?
고대 세계의 "변방" 공동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는 중심부 문화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다양하고 심오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들 지역은 단순히 알려진 세계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문화적 교류, 적응, 혁신이 일어나는 역동적인 공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이러한 '변방' 공동체들이 고대 세계 문화에 대해 제공하는 주요 통찰력입니다:
• 문화적 융합 및 적응력:
◦ 혼인과 통합: 올비아(Olbia)의 그리스인과 스키타이인, 이집트-누비아 국경의 이집트인과 누비아인처럼, 이들 공동체에서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혼인이 흔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는 중심부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화적 우월주의적 태도와는 대조적입니다.
◦ 문화적 교류: 올비아의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이 의복(바지)을 채택하고, 스키타이인들은 희석되지 않은 와인을 마시는 그리스식 음주 습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집트 부헨(Buhen)의 이집트 군인들은 누비아 요리용 냄비를 대량으로 사용하며 누비아 요리를 수용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문화적 경계가 유연하고 상호 교류가 빈번했음을 보여줍니다.
◦ 정체성의 유연성: 빌스크(Bilsk)의 스키타이인들은 유목민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농목업을 병행하고 거대한 목조 도시(젤로누스)에 거주하는 등 정주 생활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볼루빌리스(Volubilis)의 주민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음에도 푸닉(Punic)과 마우리(Mauri)의 유산을 이름에 유지했습니다. 이는 문화적 정체성이 복잡하고 변동 가능함을 시사합니다.
• 고정관념과 중심부 서사에 대한 도전:
◦ '야만인'에 대한 재해석: 헤로도투스(Herodotus)와 같은 고대 작가들은 스키타이인이나 다른 변방 민족들을 야만적이고 미개한 존재로 묘사했지만, 발굴된 증거는 이들이 복잡하고 적응력 있는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 기념물 건설의 주체: 케냐 투르카나 호수(Lake Turkana) 주변의 로타감 북부 기둥 유적지(Lothagam North Pillar Site)는 유목민 목축업자들이 대규모 기념물을 건설했다는 증거를 제공하며, 이는 기념물 건설이 정주 사회만의 특징이라는 전통적인 가정에 도전합니다. 빌스크의 거대한 목조 요새 또한 유목민이 건설했습니다.
◦ 여성의 역할: 라크 비엣(Lac Viet) 사람들(베트남) 사이에서는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보장되고 결혼이 모계 유대(matrilineal bonds)를 강화하는 등 여성의 사회적 영향력이 컸습니다. 쯩 자매(Trung sisters)의 반란(베트남)처럼 여성 지도자들이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는 가부장적 사회라는 일반적인 고대 세계상에 대한 대조를 이룹니다.
◦ 지식과 혁신의 중심지: 이집트 나우크라티스(Naucratis)는 성매매 여성으로도 유명한 무역 도시였지만, 플라톤(Plato)과 헤로도투스 같은 지식인들이 방문했으며, 자체적으로 작가들을 배출한 지적 교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인도 탁실라(Taxila)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승'이 있는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는 혁신이 특정 중심지에서만 일어난다는 통념을 깨뜨립니다.
• 글로벌 무역 및 상호 연결성:
◦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 이들 변방 공동체들은 종종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의 핵심 허브 역할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메기도(Megiddo)에서는 영국 콘월(Cornwall)의 주석과 인도네시아 또는 중국의 바닐라, 콩, 강황과 같은 이국적인 식자재가 발견되어 고대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더 상호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해상 무역의 중요성: 동유럽과 중국을 연결하는 육상 실크로드 이전에 이미 인도양을 통한 해상 무역 네트워크가 광범위하게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 동전이 베트남 옥애오(Oc Eo)에서 발견되거나, 악숨(Aksum)의 상아 제품이 앵글로색슨 시대 영국 무덤에서 발견되는 등, 대륙 간 직접적인 접촉 없이도 상품과 아이디어가 교환되었습니다.
• 언어와 정체성의 표현:
◦ 다국어 사용: 마살리아(Massalia)는 그리스어, 라틴어, 갈리아어(Gallic)를 구사하는 삼중 언어 사회였고, 볼루빌리스의 유대인 묘비에는 히브리어 문구가 사용되었습니다. 아쇼카(Ashoka)의 칙령(Taxila)은 그리스어와 아람어(Aramaic)를 병기했습니다. 이는 언어가 문화적 정체성과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 언어적 융합: 올비아의 그리스인들이 사용한 그리스어 방언이나 오비디우스(Ovid)가 토미스(Tomis)에서 경험한 현지 언어 혼합 현상처럼 변방에서는 지역 방언이 나타나고 언어적 융합이 발생했습니다.
• 독특한 종교적 표현:
◦ 종교적 유연성: 메기도에서는 카나안(Canaan) 종교와 유대교의 확산 속에서도 아셰라(Asherah) 숭배가 지속되는 등 독특한 종교적 표현이 나타났습니다.
◦ 불교의 전파와 예술적 영향: 탁실라는 불교의 지적, 영적 중심지가 되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상(佛像)의 인간적 형상을 만들게 된 곳입니다. 이는 불교가 그리스-로마 이집트와 같은 서방 세계로 퍼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기독교의 독자적 발전: 악숨 왕국은 외부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기독교 정체성을 형성하여 에티오피아 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들은 이슬람의 초기 확장 시기에도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 존중을 보였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들 "변방" 공동체는 고대 세계의 문화적, 사회적 역동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풍부하게 합니다. 이들은 중심부의 시선이 아닌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고정된 경계를 넘어서는 문화적 혼합, 적응, 혁신, 그리고 상호 연결성의 복잡한 그림을 제시합니다. 이는 역사를 통해 분열이 아닌 통합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Section 1 : Pre History -------
-------Section 2 : Greek World -------
-------Section 3 : The Roman World -------
-------Section 4 : Beyond The Classical World -------
A reconstruction of Ptolemy’s world map (90–168 CE), by Nicolaus Germanus in 1482 CE